동방 정교회 Eastern Orthodox Church
Korean Flowers of Orthodoxy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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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주의 Orthodoxy
종교에서 정통주의(正統主義, Orthodoxy)란 경전에 있는 신앙, 가르침, 이데올로기 등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현대주의, 개혁주의 등과 대척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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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 그리스도교
Eastern Christianity
정교회는 동방 그리스도교의 풍부한 영적 보화들을 담고 있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먼저 선포된 곳, 최초의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세워진 곳은 지중해를 둘러싼 지역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이 지역, 고대 로마 제국의 동쪽 지역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교도와 이단들에 맞선 투쟁 속에서 성숙해졌습니다. 위대한 교부들이 살았고 가르쳤던 곳도 바로 그곳입니다. 우리 신앙의 근본적인 요소들이 일곱 번의 세계 공의회를 통해 선언된 곳도 바로 동방의 도시들입니다.
동방에서 양육된 그리스도교 정신은 특별합니다. 그것은 비록 반드시 대립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로마제국의 서쪽지역에서 발전되고 서방 중세로 이어진 서방 그리스도교 정신과 분명 구별됩니다. 서방 그리스도교가 고대 로마의 법과 도덕철학으로 유명한 땅에서 발전된 반면, 동방 그리스도교는 셈족과 헬레네 문화로 유명한 땅에서 발전되었습니다. 서방이 그리스도의 수난과 인간의 죄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면, 동방은 그리스도의 부활과 인간의 신화(deification), 테오시스(θεοσις)를 강조했습니다. 서방이 종교의 법정적인 관점에 기대었다면, 동방은 더욱 신비적인 신학과 결부되었습니다. 초기 교회는 균일하지 않았습니다. 이 두 위대한 전통은 대분열이 교회를 갈라놓기 전 천년 이상을 함께 존재했습니다. 오늘날, 로마 가톨릭교와 개신교가 서방 전통의 계승자라면, 정교회는 동방 전통의 계승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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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교회
Orthodox Church
동방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를 정통이라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는 것은 5세기부터 우리에게 이어져 온 것이고, 매우 밀접한 두 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정통이라는 말의 첫 번째 정의는 “참된 가르침”입니다. 정통 교회(정교회)는 오류와 왜곡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리스도교 신앙을 사도들의 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지키고 계승해 왔다고 믿습니다. 두 번째 정의는, “참된 기도”입니다. 실제로는 이 두 번째 정의를 더 선호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이신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기도하고 영광 돌리는 것은 교회의 근본적인 목적입니다. 교회의 모든 활동들, 교회의 교리 조항들까지도 모두가 다 이 목적을 향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가톨릭이라는 말도 정교회를 정의하는 말로 사용됩니다. 이것은 1세기를 더 거슬러 올라가서 니케아 세계 공의회에서 구현됩니다. 니케아 세계 공의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되고(가톨릭) 사도적인 교회”를 고백했습니다. 정교회의 관점에서 볼 때, 가톨릭은 교회가 보편적이라는 것 그리고 교회가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인종과 문화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또한 교회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충만을 보존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정교회를 묘사할 때, 그리스, 러시아, 안티오키아 등의 관형어를 쓸 수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표현들은 어떤 교구, 주교구, 대주교구의 문화적 민족적 뿌리를 표현하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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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통 교회 - 통일성 안에서의 다양성
Orthodox Church - Diversity within Unity
정교회는 총대주교구, 독립교구, 자치 교구로 존재하는 교회들의 세계적인 연합입니다. 각 교회는 그 내부 조직에 있어서 독립되어 있고, 고유하고 특별한 관습들을 따릅니다. 하지만 모든 교회는 동일한 신앙과 직제 안에서 통일되어 있습니다. 정교회는 통일성이 획일성을 의미하지 않음을 인식합니다. 콘스탄티노플 교회처럼 어떤 교회들은 역사가 깊고 풍요롭습니다. 반면 핀란드 교회처럼 상대적으로 짧은 역사를 가진 교회도 있습니다. 러시아 교회처럼 광대한 지역을 포괄하는 교회도 있고, 시나이 교회처럼 작은 지역의 관할하는 교회도 있습니다. 각 교회는 주교 회의에 의해 지도됩니다. 주교회의의 의장은 총대주교, 대주교, 수도대주교, 혹은 가톨리코스 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주교들 중, 콘스탄티노플의 세계 총대주교는 ‘최고 명예의 자리’를 차지하고, ‘동등한 자들 중의 첫째’로 여겨집니다. 서유럽, 남북미, 아시아처럼 정교회가 짧은 역사를 가진 곳에는 여러 독립교회들 중 어느 하나와 직접적으로 연결된 많은 주교구와 대주교구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구의 보살핌 아래 있습니다. 많은 차원에서 내적 자치를 누리고, 자신의 대주교를 두고 있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영적인 지도에 순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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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Christ is Risen! Indeed, He is Ris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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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들을 그냥 놓아두어라
"Let the children come to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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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나의 구세주 나의 방패
Jesus Christ My Messiah My Sh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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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계신 (주님의 기도)
The Lord’s Prayer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시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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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구 성 안드레아 수도원
St Andrew's Yanggu Orthodox Monastery, South Korea
양구 성 안드레아 수도원
주소: 강원도 양구군 동면 바랑길 189-12
전화: 033 481 5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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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구세주변모수도원
Gapyeong Orthodox Monastery, South Korea
정교회 구세주변모수도원
주소: 경기도 가평군 상면 녹수계곡로 157-227
전화: 031 584 2082
팩스: 031 585 2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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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란 What is Orthodox Church?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하나인(One), 거룩하고(Holy), 공번되고(Catholic),사도로부터(Apostolic) 이어오는 교회”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셨고, 오순절의 성령 강림을 통하여 사도들에 의해서 세상에 널리 전교 되었으며, 위대한 교부들에 의해 조직되어 수많은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세워진 그리스도교, 바로 그 하나의 교회를 말하는 것입니다.
“올바른 믿음”, “올바른 가르침” 이라는 의미를 지닌 정교회는 성서와 성전(Sacred Tradition)을 근원으로 사도들로부터 계승되고, 일곱번의 세계 공의회(Ecumenical Holy Synod)를 통해 확립된 교회 규범(Canon)으로 순수한 교회의 정통성을 지키고 보존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역사를 단절 없이 지금까지 지켜 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성령께서 사도들에게 강림하셨던 예루살렘을 시작으로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 로마 등 5개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고, 이들은 하나의 유기적인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세계 공의회를 통해 그리스도교의 기초가 되는 교리와 전례를 공식으로 제정하고 완성하였습니다.
그러나 초기 5대 교구로 형성되어 내려오던 하나의 교회는 1054년에 일어난 동서방 교회의 분열로 인하여 예루살렘, 안티오키아, 알렉산드리아, 콘스탄티노플의 4개 지역을 관할하는 정교회와 로마를 배경으로 한 로마 가톨릭으로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이후, 1517년에 서방 교회에서 루터 등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으로 로마 가톨릭에서 지금의 개신 교회가 분열되는 역사적 상황을 맞게 됩니다.)
정교회는 이런 그리스도교의 역사적인 상황의 변화 속에서도 분열 없이 하나의 교회를 유지하면서 현재 전세계의 200여 국가에서 약 3억 명의 교인들이 “하나의 믿음” 으로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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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성경
The Holy Bible in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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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언어 및 번역본
Bible languages and transl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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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 중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셨다
Easter Message 부활절 메시지 – 부활절 2012
“죽은 자 중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셨다.” (제3조 부활 찬양가)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만약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리스도 자신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부활은 우리들에게 다만 하찮은 의미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만 부활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부활하셨습니다. 우리 이전에 요한 흐리소스톰 성인은 이 점을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네! 더 이상 무덤에는 죽은 자들이 없도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므로 잠든 모든 이들의 부활이 시작되었도다.” 그리고 앞으로 안식할 모든 이들까지도 부활할 것이고, 모두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질 것입니다. 이 소식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부활이 죽음의 권세를 물리쳤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믿는 모든 이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또한 주님의 죽음으로부터 세례 받고, 주님과 함께 부활하고, 주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있는 사람들은 물질을 축적하면서 삶의 희망을 물질에 두려고 애씁니다. 물질의 부로 죽음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물질의 부를 축적하면 삶을 연장할 수 있다고 현혹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죽음을 흩뿌리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의 생활기반이 되는 경제력도 빼앗고, 많은 경우 자신을 구할 수도 있는 생명을 위협하는 데에까지 이르기도 합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나요! 그들의 잘못은 엄청난 것입니다. 생명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일치해야지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정교회의 경험을 통해서 보면 그리스도와 일치한 사람들은 죽은 후에도 살아있는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고, 함께 이야기하고, 많은 경우 경이로운 방법으로 살아있는 사람들이 요청하는 바를 이루어주는 경우를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영생의 물”을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부활은 그리스도에게 있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이들에게 제공됩니다. 다른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모든 백성이 멸망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더 편하게 살기위하여 무고한 사람들이 몰살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과 땅의 모든 이들에게 생명을 베풀어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셨고, 그리스도를 원하는 사람들은 부활의 길을 따릅니다. 하지만 반대로, 직접 혹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이렇게 하면 그들의 삶이 더 쉬울 거라고 생각하면서 죽음을 흩뿌리는 사람들은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사람들은 생명과 풍족한 삶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이들이 크게 잘못하는 것은 서로 파괴하는 것이 세상에 큰 번영을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이들을 부활시키시고 그들의 죽음을 소멸시키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죽음을 물리치신 사건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혐오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생명으로 인도하시고, 혹시 죽음으로 인해 생명이 끊어지게 되면 다시 생명을 주십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생명이고 부활”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 신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한 것은 우리의 존재를 해칠 수 없기 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우리가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도 부활할 것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고 주님께서 하신 일을 본받읍시다. 삶을 어려워하고, 삶을 빼앗길 것 같은 사람들을 도와줍시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이 사라졌으므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주님 부활의 참여자가 될 수 있음을 전파합시다. 우리의 부활이 현실화 될 수 있으려면 우리의 다른 형제들에게도 부활이 가능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는 승리의 메시지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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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법, 영혼 구원을 위한 신앙 지침
Canon Law, Faith Guidance for Soul Rescue
법학자들 사이에서 “하늘나라에서도 교회법이 존재할까?”라는 논쟁이 벌어졌고, 교회법이 필요하다는 결론이 났다. “사회 있는 곳에 법이 있다”는 격언에서 보듯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는 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교회도 하나의 사회이기에 규범이 있어야 한다. 이는 교회의 교계제도와 조직의 구조가 가시적이기 위함이고, 하느님께서 교회에 맡기신 임무, 특히 거룩한 성사와 권한을 올바르게 집행하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안식일 법의 주인이 사람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법도 교회의 구성원인 하느님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와 신자들의 원활한 삶과 신앙을 위해 있는 것이다.
교회법은 좁은 의미에서 척도나 규범, 규율을 뜻하는 카논(canon)이라고 부른다. 교회의 직권에 의해 반포된 성문법과 그 조항, 즉 교회가 정한 신앙의 진리, 도덕률, 규율이다.
그럼 ‘교회법 정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느님 백성을 이끄시는 하느님에게서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시거나 예언자나 다른 계시를 통해 알려주신 내용이 교회법 내용이며 정신이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당신 백성이 태어나게 하시고, 교회 안에서 성장해 공동체를 이루며, 하느님 자녀로서 품위를 유지하고 모든 영혼을 구원으로 이끌도록 해주는 것이 바로 ‘교회법 정신’이다.
‘교회법 정신’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교회를 알아야 한다. 공의회 문헌 「계시헌장」에서는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비체이고 영적인 공동체인 동시에 교계 조직으로 이루어진 사회’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는 교회가 영적 존재인 동시에 가시적 제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법은 ‘그리스도의 신비체이고 영적인 공동체’와 ‘보이는 조직’이 잘 결합해 운영하도록 보이는 법을 통해 ‘봉사하는 도구’라 할 수 있다.
교회법은 하느님과 그 백성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법의 원천은 구약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가 설정하시고 가르쳐 주신 내용, 초기 교회에서 사도들이 성령의 도움을 받아 공동체가 나갈 방향을 정한 내용 등이 그 원천이다. 여기에 4세기 이후 교회가 공의회를 개최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한 교리와 계명, 전례 및 조직에 관한 규정, 교회가 점차 국가교회로 자리매김하면서 등장한 개혁법령집들도 포함된다.
이런 교회법은 교회의 공적 가르침을 근거로 한다. 성경과 성전 교부들의 공적 가르침에 법적인 성격을 부여한 것이 교회법이다. 또한, 교회법은 교리서의 기초에 근거가 된다. 교회의 가장 훌륭한 공적 영적서적은 성경, 교부들의 가르침, 교회법, 교리서라고도 한다. 그 내용을 하나하나 묵상하며 읽는다면 더없이 좋은 영성서적일 것이다.
교회법은 하느님 백성인 교회와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자아(교회)상을 표현한 것이다. 이는 교회법을 통해 하느님 백성으로서 품위를 유지하고자 하는 지향이며, 더 멋진 공동체를 만들어 가며 서로가 잘살기 위한 바람이다. 교회법은 하느님 나라를 향한 여정에서 친교를 누리며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행한 약속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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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비신자
Catechu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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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들에게도 인간처럼 영혼이 있나요?
Do animals have souls?
하느님께서는 말씀으로 동물들을 만드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창세기1,20.24) 또한 동물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고
생존할 수 있도록 본능을 비롯한 여러 가지 능력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성서의 기록에 의하면 동물의 생명은 그 피 속에 있으며,
(신명기 12,23)하느님께서 숨과 함께 불어 넣으셨고 또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은 오직 인간만이 갖고 있습니다. 동물에게는 불멸
의 영혼이 없습니다. 동물은 죽으면서 그 존재가 영원히 사라집니다. 동물은 주님이 재림하실 때 죽음에서 부활하지 않습니다. 동
물에게는 이성이 없기 때문에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으며. 따라서 심판의 날에 창조주에게 자신이 한 일을 낱낱이 고
백할 필요가 없습니다. 동물에게 아무리 훌륭한 속성이 주어졌다 해도(개나 말의 주인에 대한 헌신 등)동물을 이성과 영혼을 가
진 인간과 동등한 취급을 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물론 동물도 하느님의 창조물 중의 하나이며, 하느님께서는 동물에게 여러
은사와 능력을 주셨으므로 동물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는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동물을 사랑하고 또 돌보아 주어야 합니다. 동
물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표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다양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봉사하
라고 동물들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부산성모희보성당 ORTHODOX BUSAN,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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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여자들 중에 가장 복받은 사람이며 네 태중의 아기도 복받은 분이다”
(누가복음 1:42)
“Blessed are you among women, and blessed is the child you will bear” (Luke 1:42)
누가복음 1:39-45:
39 그 후에 마리아는 유대 산골 사가랴가 사는 마을로 급히 가서
40 엘리사벳을 방문하였다.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엘리사벳의 태중의 아기가 뛰었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42 큰 소리로 이렇게 말하였다. “너는 여자들 중에 가장 복받은 사람이며 네 태중의 [d]아기도 복받은 분이다.
43 내 주님의 어머니가 나를 찾아오다니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44 네가 인사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내 태중의 아기가 기뻐서 뛰었다.
45 주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은 여자는 정말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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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스콜라스티카 (+543년)
Saint Scholastica of Monte Cassino, Italy
스콜라스티카 (St Scholastica) (480년 – 543년) 는 베네딕토 수녀회의 초대 수녀원장이며 누르시아의 베네딕토의 여동생이다.
스콜라스티카는 베네딕토의 쌍둥이 누이동생으로 480년경 이탈리아 노르치아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이미 그녀는 자신의 삶을 하느님에게 바치기로 결심했다. 일찍부터 수비아코의 수녀원에 들어가 생활했으며 나중에는 몬테카시노 기슭의 푸마롤라에서 수도생활을 했다. 성녀에 대해서 알려진 몇 안되는 사실은 성 그레고리오의 《성인전》에 나오는 것인데, 그레고리오는 베네딕토의 생애에 대해서 기록하면서 그의 신성함을 증명하는 많은 기적적인 사건들을 설명하고 있다. 스콜라스티카와 베네딕토는 두 수도원의 가운데 있는 한 집에서 정기적으로 만났다. 마지막 만남이 있던 날 스콜라스티카는 수도원으로 돌아가려는 오빠에게 밤새워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으나 베네딕토는 수도원의 규율을 어길 수 없어 돌아가려고 했다. 스콜라스티카가 기도를 올리자 하느님은 그녀의 기도를 들어주어 갑자기 무서운 폭풍이 몰아치게 하여 베네딕토는 밤새 그 집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베네딕토가 몬테카시노의 수도원으로 돌아간 며칠 뒤 베네딕토는 스콜라스티카의 영혼이 비둘기 형태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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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정교회 대교구
Orthodox Metropolis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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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복단 – 산상 설교 (마태복음 5:1-12)
The Beatitudes (Matthew 5:1-12)
1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분에게 나아왔다.
2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가르치셨다.
3“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슬퍼하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유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땅을 물려받을 것이다.
6의를 위해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원하는 것을 다 얻을 것이다.
7남을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나님도 그들을 불쌍히 여기실 것이다.
8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을 볼 것이다.
9화평을 이루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10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사람들은 행복하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나 때문에 사람들이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말로 온갖 악담을 할 때에 너희는 행복하다.
12하늘에서 큰 상이 너희를 기다리고 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전의 예언자들도 이런 핍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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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결하신 동정녀시여, 정결한 테오토코스여
O Virgin Pure
순결하신 동정녀시여, 정결한 테오토코스여
왕비인 동정녀 어머니, 시원한 위로를 주시는
하늘보다 더 높으신, 광채보다 더 빛나는
동정녀들 중 큰 기쁨이신, 천사 중에 가장 높으신
하늘보다 빛을 더 발하고 빛보다 더 투명하신,
하늘의 천사 군대보다 가장 거룩하신
당신께 간청하나이다, 지금 당신을 부릅니다.
왕비여,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중보하소서.
정결하고 흠 없는 딸이시여, 동정녀 성모 마리아여
당신께 호소하나이다, 거룩한 성전이시여.
온갖 시련에서 보호해 주시고 구원해 주소서.
영원한 생명을 유산으로 물려 주소서.
혼인한 바 없는 신부여, 기뻐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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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파트리키우스 (+461년)
Saint Patrick of Ireland
마고누스 수케투스 파트리키우스 코티르티아쿠스, 통칭 성자 파트리키우스 은 아일랜드의 수호성인이다.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활동한 기독교 선교사이자 주교이다.
4세기에 부유한 로마계 영국인 가문에서 태어났다. 파트리키우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교회에서 부제를 맡고 있었다. 파트리키우스가 16살 때 해적에 납치되어 아일랜드로 끌려가 노예로 지냈다. 파트리키우스가 끌려간 장소는 아일랜드 서부 해안의 어딘가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려진 바 없다. 파트리키우스의 고백론에 따르면 자신은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해안에서 배를 타고 달아났고 영국으로 돌아왔으며, 갈리아 오세르에 있는 교회에서 사제가 되고자 공부를 하였다고 한다.
432년 파트리키우스는 주교로서 켈트 다신교를 믿었던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다시 아일랜드로 향하였다. 아일랜드 민담에 따르면 파트리키우스는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삼위일체를 설명하기 위해 잎이 세 개인 토끼풀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기독교를 전파한 지 30년이 지난 461년 3월 17일 파트리키우스는 숨을 거두었고, 시신은 다운패트릭에서 화장했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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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 안토니우스 (+356년)
Saint Anthony the Great of Egypt
성 안토니우스, 대수도원장 안토니우스, 이집트의 안토니우스, 사막의 안토니우스, 은자 안토니우스, 압바스 안토니오스 그리고 모든 수사의 교부라고 알려진 대 안토니우스(영어: Anthony the Great 또는 Antony the Great)(251년경~356년경)는 이집트 출신 기독교 성인으로, 사막의 교부들 가운데 저명한 지도자였다.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가 기록한 안토니우스 전기는 라틴어로 번역되어 특히 서유럽에 수도원주의 개념을 전파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는 종종 최초 수사로 오인되지만, 그 전기와 다른 자료들은 그 이전에 많은 금욕주의자가 있었음을 명백히 한다. 그렇지만, 성 안토니우스는 (270년에서 271년 사이) 광야로 나간, 그 지리적 이동으로도 그의 명성에 기여한 첫 번째 수사로 알려졌다.
안토니우스는 전염성 질병, 특히 피부질환에 대항하는 호소를 받는다. 성안토니열(熱)은 맥각중독과 단독 그리고 대상포진을 포함하는 여러 고통을 의미한다.
생애
안토니의 생에에 대하여 알려진 대부분은 책자 《안토니의 생애》(Life of Anthony)에서 비롯되었다. 360년 경에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작성된 이 책은 원시의 풍경에 있는 그의 존재를 통하여 문맹인 거룩한 사람으로서의 안토니우스에게 전기 작가로서의 아타나시우스의 것과 언제나 같은 뜻의 신성한 진리와의 절대적인 관계가 있음을 묘사하고 있다. 374년 이전의 언젠가, 그 저서는 안티오케이아의 에바그리우스에 의해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 라틴어 번역본인 《생애》(Life)가 기독교 세계에서 가장 잘 알려진 문학 작품 중에 하나가 되는데, 그 지위가 중세까지 유지되곤 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 《생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진본의 잔존하는 여러 설교문들과 서신들도 얼마간의 부가적인 자서전의 상세 내용들을 제공한다.
안토니우스는 251년에 하 이집트 헤라클레오폴리스 마그나 근교의 쿠마에서 부유한 토지 소유주 콥트족의 그리스도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가 약 18세 쯤일 때, 그의 부모가 죽었고 그는 미혼인 그의 여동생에 맡겨졌다.
그와 돼지와 연관되는 많은 전설들이 있다. 그 중 하나는 한때 그가 양돈인으로 일했다고 한다.
285년에, 그의 나이 34세 때, 그는 복음적 권고의 일부인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고 한 예수의 말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이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안토니우스는 가문의 소유지의 일부를 그의 이웃들에게 거저 주었고, 남은 재산을 팔아 빈자를 위한 기금에 기부했으며, 그의 여동생을 당시의 최초의 수녀회의 일종인 그리스도의 처녀단의 일원이 되게했고, 그 스스로는 지역의 은수자의 제자가 되었다.
"수도원주의의 교부"라는 명칭은 이미 이집트의 사막에서 실행되고 있던 기독교 수도원주의로 오인된다. 금욕주의는 도시들의 변두리들에 있는 고립된 장소들에서 은거하는 것이다. 안토니우스는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채, 순전히 사막에서 생활하려 한 최초의 금욕주의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된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은수자적인 생활방식은 그의 선배들보다 현저히 더 엄격했다. 2세기 경에 성 테클라와 같은 유명한 기독교 금욕주의자도 있었다. 성 안토니우스는 그러한 전통을 따르기로 결정했고, 서부 사막의 끝자락에 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서쪽으로 약 95 킬로미터(58 마일) 거리에 있는, (니트리아와 켈리아 그리고 스케티스 수도원들의 소재지가 된) 알칼리성의 니트리아 사막 지역으로 향했다. 그는 거기서 13년을 지냈다.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악마가 지루함과 게으름, 여성의 혼령으로 괴롭히며 성 안토니우스와 싸웠는데, 이 성인은 기도의 힘으로 극복했다고 한다. (그러함은 기독교 미술의 주제를 제공한다.) 그 이후에, 그는 그가 살았고 그에게 음식을 가져다 주는 지역 주민들에게 의지하는 자신의 문을 닫은 곳의 한 무덤으로 갔다. 악마가 그의 금욕주의와 열렬한 예배를 알았을 때, 그 악마는 그를 시기하여 폭행하였고, 의식을 잃은 그를 떠났다. 지역의 마을에서 그의 친구가 그를 만나러 와서 그의 그런 상태를 보고는, 그를 한 교회로 이송했다.
그는 회복된 후에, 다시 노력하기 위해 사막에서 크로코딜로폴리스 맞은편의 피스피르라고 불리며 오늘날 데르 엘 메눔인 나일강 유역의 더 먼 산으로 들어갔다. 그 곳에서 그는 로마의 오래된 버려진 요새에서 약 20년 동안 엄격히 폐쇄된 채 생활했다. 아타나시우스에 의하면, 그 악마가 다시 성 안토니우스와의 전쟁을 재개했고, 그 때 만큼은 유령들이 야수들과 늑대들, 사자들, 뱀들, 전갈들의 형태로 나타났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성인은 그들을 경멸적으로 비웃으며 "만일 너희들 중에 누가 나를 제압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그 한 놈은 나와 싸울 정도의 능력이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가 그렇게 말하자, 그들이 연기속으로 사라졌고, 하느님은 그에게 악마를 이긴 승리를 내렸다고 한다. 그가 그 요새에 있는 동안, 음식이 들어오는 벽틈을 통해 바깥 세계와 소통했는데, 그는 몇 마디의 말을 하곤 했다. 성 안토니우스는 6개월 동안 먹을 다량의 빵을 마련하곤 했다. 그는 어느 누구도 그의 수도실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치 않았는데, 그에게 오는 사람은 누구든 바깥에서 그의 조언을 들었다.
그 후 어느 날에, 그는 주민들의 도움으로 그 요새로부터의 문을 허물었다. 그 무렵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그 혼자의 유폐로 쇠약해졌거나 미쳐버렸을 것이라고 짐작했지만, 그는 건강하고, 평온하며, 개화되어 나타났다. 모든 사람들은 그가 시련을 통해 영적으로 활기를 되찾은 등장에 놀라워 했다. 그는 영웅으로 찬사를 받았으며, 그 이후부터 안토니우스의 전설이 확산되며 확대되기 시작했다. 안토니우스는 파이윰으로 가서 믿음을 가지고 있는 교우들을 확인한 다음에, 그의 옛 로마 요새로 되돌아갔다. 그는 그리스도 때문에 투옥된 사람들을 만나서 그들을 위로했다. 총독은 그가 그에게서 일어날 법한 일은 개의치 않고 공공연하게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것을 보고, 그가 도시에 나타나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이 성인은 그의 위협에 유의치 않고 계속 머물러 있었다. 이 후에 그는 다시 총독을 만났는데, 그가 총독의 분노를 돋굴 정도로 그에게 반박하므로, 고문당하고 순교당할 뻔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박해 끝에 그는 알렉산드리아를 떠나 로마의 옛 요새로 되돌아갔다. 거기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 그의 가르침을 듣기 위해 찾아왔다. 그는 그의 예배를 멀리하는 방문객들을 보았다. 그 결과, 그는 이집트의 동부 사막으로 더 들어갔다. 그는 샘과 종려나무 몇 그루를 찾을 때까지, 3일 동안 깊은 광야를 여행했는데, 샘과 종려나무 몇 그루를 발견하고 거기서 정착하기로 결정했다. 그 자리에 오늘날의 성 대 안토니우스 수도원이 있다. 거기서, 그는 약 200년 뒤에 있을 누르시아의 베네딕토의 규칙을 예견했고, 스스로 그리고 그의 제자 또는 제자들을 수공일에 참여하게 하여 "기도와 일"을 했다. 안토니우스는 스스로 뜰을 경작하고 등심초 깔개를 짰다. 그와 그의 제자들은 정기적으로 계몽의 말을 찾게 되었다. 그러한 언사들은 저서 사막 교부들의 고담집으로 집성되었다. 안토니우스는 더 세속직인 방문자들을 마카리우스에게 보내는 일을 떠나서, 스스로 자신으로서 영적인 성향에 대해서 말했다고 한다. 가끔, 그는 교우들을 만나러 나일강 사막의 외곽에 있는 한 수도원으로 간 다음에, 사막 내에 있는 그의 수도원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콘스탄티누스 1세에게 직접 전해진 잔존하는 서신들 중 하나의 배경 내용은 성 안토니우스의 명성이 어떻게 국외로 전파되었고 황제 콘스탄티누스에게 도달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황제는 그에 대한 찬사와 그를 위한 기도를 묻는 글을 작성했다. 교우들은 황제의 편지에 만족했지만, 안토니우스는 그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으며, 그는 그들에게 "하느님의 책들, 왕들 중에 왕 그리고 영주들 중에 영주가 날마다 우리에게 명령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무엇을 유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교회를 사랑한다."라고 그에게 말한 교우의 고집으로 인해, 그는 황제를 축복하고 제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기도하는 편지를 작성해야함을 받아들였다.
아타나시우스에 따르면, 성 안토니우스가 그에게 "나가서 보아라."라고 말하는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그는 나가서 거룩한 에스케엠(체발 또는 스케마)와 닮았고 머리에는 두건을 썼으며, 십자가가 있는 허리띠를 맨 한 천사를 보았다고 한다. 그는 앉아서 종려잎을 땋다가, 일어서서 기도하고 다시 앉아서 그것을 땋다. 한 음성이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안토니우스여, 그것을 하고 너는 쉬게 될 것이다." 그 후에, 그는 그가 본 튜닉을 입기 시작했고, 종려 잎이 엮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성 안토니우스는 교회에 그리고 이교도의 지배로 인해 발생할, 교회가 승리하고 형식적인 영광이 돌아올, 그리고 이 시대의 끝에서의 박해에 대해서 예언했다고 한다. 성 마카리우스가 안토니우스를 찾아왔을 때, 성 안토니우스는 그에게 수사 복장을 입혀주었고 그의 일을 예언했다. 최초의 은수자 성 파올로가 사막에서 떠날 날이 가까워 오자, 성 안토니우스는 그에게로 갔고, 그가 죽자, 20 번째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인 사도좌의 아타나시우스에게 선물받았던 튜닉을 입힌 후에, 그를 묻었다.
338년에, 그는 아리우스의 가르침을 논박하는데 도움이 되기 위해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소환되었다.
말년
성 안토니우스는 그가 떠날 날이 다가옴을 느꼈을 때,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그의 지팡이를 성 마카리우스에게 주고, 한 개의 양피 망토를 성 아타나시우스에게 주고 다른 양피 망토는 그의 제자 세라피온에게 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추가적으로, 그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신의 시신을 비석 없는 비밀 묘에 묻으라고 유언했다.
그의 모국어는 아마도 콥트어인 것 같지만, 그의 말은 그리스어 번역본으로 전파되었다. 그는 스스로 저서를 남기지는 않았다. 그의 전기는 성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작성되었으며 《대 성 안토니우스의 생애》(Life of Saint Anthony the Great)라는 제목이 붙었다. 많은 이야기들은 사막 교부들의 많은 격언들의 모음집에서의 그에 대해서 말한다.
비록 안토니우스가 스스로 수도원을 조직하거나 설립하지 않았을지라도, 한 공동체는 금욕과 고립된 삶을 사는 그의 본보기를 기반으로 하는 그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아타나시우스의 전기는 안토니우스의 이상을 전달하는데 도움이 된다. 아타나시우스의 저서에는 "수사들에게, 안토니우스의 삶은 금욕주의의 충분한 모범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유혹
유명하게, 안토니우스는 사막을 순례하는 동안에 일련의 초자연적인 유혹들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 유혹을 기록한 최초의 사람은 그와 동시대의 알렉산드리아의 아타나시우스이다. 그러나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안토니우스가 경험했다고 기록된 악마들과 유혹들은 안토니우스를 찾아왔던 평범한 순례자들이 그들에게 전해졌던 것보다 어느정도 더 극적인 방식으로의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 전해질 수도 있는 그런 순례자들에 의해 아타나시우스와 연관지어졌다고 주장한다.
금과 은
성 안토니우스가 사막을 여행하던 또 다른 때에, 가는 길에 은화 한 판을 발견했다. 그는 그 순간에 아무도 여행한적 없는 사막에는 없어야 할 은화 한 판이 떨어져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때에, 그는 악마가 그를 유혹하려고 그것을 거기에 두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허! 악마야, 당신이 나를 유혹하고 나를 속이려 하는구나. 하지만, 너의 힘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한 번 말하자, 그 은판이 사라졌다. 그는 계속해서 걷고 있는데, 가는 길에 악마가 그를 속이려고 놓아둔 황금 더미를 보았다. 성 안토니는 그 황금 더미를 불 속에 집어 던졌는데, 그것은 마치 그 은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 사건들 이후에, 성 안토니우스는 온 세상이 덫들과 함정들로 가득 찬 꿈을 꿈었다. 그는 주에게 "오, 좋으신 주님, 누가 이러한 덫들을 피할 수도 있겠습니까?"라며 애원했다. 한 음성이 그에게 응답했다. "겸손은 더없이 그것들을 피할 것이다."
동굴의 악마
한때, 성 안토니우스는 그를 괴롭히는 악마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동굴에 숨으려고 하였다. 동굴에는 많은 작은 악마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성 안토니우스를 죽도록 때리고 있었기 때문에, 성 안토니우스의 하인이 그를 밖으로 옮겼다. 은수자들이 성 안토니우스의 죽음을 애도하려 그 시신으로 모여들었을 때, 그가 소생되었다. 그는 그의 하인에게 악마들이 그를 구타하던 동굴로 데려갈 것을 요구했다. 그가 거기서 악마에게 소리쳣을 때, 그들은 그를 갈기갈기 찢으려 야수들로 돌아왔다. 갑자기, 환한 빛이 번적이더니, 그 악마들이 도망쳤다. 성 안토니우스는 그 빛이 하느님으로부터 왔음을 알고, 그는 전에 악마들이 공격할 때 하느님께서 어디에 계셨는지 물었다. 하느님은 대답했다. "나는 여기에 있지만, 나는 그대의 전투를 보곤 했는데, 견딜 수가 없었고, 당신이 그 전투에서 남자답게 싸우며 잘 견뎠으므로, 나는 그대의 이름이 온 세상에 두루 퍼지도록 할 것이다."
시성
그는 생전에 봐뒀던 산 꼭대기에 비밀히 묻혔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유해는 361년에 발견되었고, 알렉산드리아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얼마 후에, 그것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옮겨졌고, 그래서, 그것은 사라센의 침입에 의해 자행되는 파괴를 면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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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The Church
정교회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계속 이어가고 완성합니다.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의 밀접한 결합은 그리스도는 머리요 교회는 그분의 몸, 그리스도는 신랑이요 교회는 그분의 신부라고 선언하는 성경 구절 안에 분명하게 형상화되어 있습니다. 이 형상들은 교회가 그리스도와 무관하게 실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합니다.
거의 이천년 전 갈릴래아에서 첫 제자들에게 나타나시고, 사랑받으시고, 추종되시었던 구세주는 그 후 그분의 교회를 통하여 알려지시고, 사랑받으시고, 추종되시는 동일한 구세주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성 삼위 하느님을 계시하셨기 때문에, 그분의 교회도 계속해서 거룩한 성 삼위 하느님을 드러내고 예배 안에서 그 하느님께 기도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아버지 하느님과 화해시키셨기 때문에, 그분의 교회도 계속해서 말씀과 행동으로 온 세상에서 화해의 매개가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참된 삶의 소명을 밝히 드러내주셨기에, 그분의 교회도 계속해서 우리 각자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이 완성에 이르게 해주는 장이 됩니다.
정교회 그리스도인은 세례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매번의 감사의 성찬 예배에서 그리스도로 양식을 공급받습니다. 우리는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하여 일하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시고 그분의 사역을 완성에 이르게 하신다고 믿습니다.
정교회는 교회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축소 환원시키려는 모든 시도들을 거부해 왔습니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요 성령의 전이라고 말하는 성경의 표현은 교회가 많은 제도들 중 하나로, 혹은 하나의 사회 구제 조직으로, 혹은 민족적 형제적 친교 단체로 생각하는 것 이상의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분명 교회는 제도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고, 언제나 교회를 구성하는 사람들의 죄와 한계성에 종속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교회는 교회가 인간적 차원과 더불어 분명 신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를 표현하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하느님께서 불러 모으신 공동체를 함축합니다. 이것은 교회가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이 만나는 유일한 장으로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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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 체험
Personal Experience
정교회 밖에 있는 개인은 정교 신앙을 온전하게 이해하거나 소유할 수 없습니다. 교회를 떠나 각자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보면 정교회는 수많은 세계관 중 하나로, 하나의 문화적 부수물로, 기껏해야 형식적 교회로 잘못 보일 수 있습니다. 신적인 삶의 계시로서 정교신앙을 경험하게 해주는 필수적인 관점은 오직 교회 안으로부터의 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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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
The Process of Becoming an Orthodox Christian
정교회는 보편적인 소명과 부르심을 가집니다. 정교회는 그 구성원을 어떤 특정한 문화, 종족, 계층, 분파의 사람들에게 제한하지 않습니다. 정말로 정교회는 문화, 민족, 언어의 다양성을 교회의 한 부분으로 가치 있게 여깁니다. 정교회는 또한 모든 인간적 장벽들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사랑의 통일성을 주창합니다. 정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습니다.
만약 정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에 진지하게 관심이 있다면, 지역의 정교회 사제를 만나야 하고, 성당 공동체와 익숙해져야 합니다. 사제는 친절하게 안내하고 조언해 줄 뿐만 아니라 적절한 때가 되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이것은 새로운 영적 가족을 갖게 됨을 의미합니다.
사제는 정교회에 입문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특별한 신앙 강좌나 교육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 교육의 기간과 내용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이전의 경험과 교육에 따라, 그리고 각자의 특별한 필요와 관심에 따라 결정되고 진행될 것입니다.
일정한 교육 기간을 거치면, 교회로의 입문 예식이 행해집니다. 만약 그리스도교가 아닌 종교 출신이라면 신앙 고백을 하고 세례 성사와 견진 성사를 받아야 합니다. 만약 가톨릭 교회와 같이 정교회와 유사한 신앙을 가진 교회 출신으로서 합당하게 세례 받고 견진도 받았다면, 정교회와의 화해를 의미하는 간단한 도유식을 거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거룩한 영성체를 누릴 수 있는데, 감사의 성찬 예배를 함께 나누는 것은 언제나 교회와의 연합의 완성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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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께 위탁
Entrustment to Christ
정교 그리스도인의 최종적인 의탁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교회를 통해서 알려지시는 우리 주 그리스도께로의 의탁입니다. 이것은 “우리 자신과 서로를 그리고 우리의 온 생명을 우리 하느님 그리스도께 맡깁시다”라고 초대하는 교회의 연도 안에 분명하게 표현됩니다. 거룩한 성체성혈을 받아 모시기 전에 우리는 “인류를 사랑하시는 주여, 당신께 우리의 온 생명과 희망을 맡기나이다.”라고 기도합니다. 우리 각자는 유일한 존재이고, 그래서 성령에 의해 삶 속에서 각기 다른 다양한 은사들과 소명으로 강복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자신을 맡기는 것은 다양하게 표현될 것입니다. 하지만 정교회는 이 의탁이 언제나 하느님을 예배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으로 드러나고 성취된다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예배는 교회의 삶의 중심입니다. 예배, 개인적 기도, 특별히 거룩한 감사의 성찬 예배에 참여하는 것은 정교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일입니다. 이러한 행위들을 통해서 우리는 점점 더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성령의 은사들로 강복되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책임 있게 섬길 수 있게 됩니다. 정교회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떼어놓으려는 그 어떤 시도도 거부합니다. 이 둘은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 확신은 신성한 리뚜르기아를 거행할 때 사제와 회중이 번갈아 가며 “서로 한 마음으로 사랑하며 고백합시다.” “일체이시고 나뉘지 아니하시는 성부 성자 성령, 성 삼위 하느님을 믿나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통해 표현됩니다.
비록 정교회가 예배의 가치를 높이 평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교회가 복음에 따라 사는 일상적 삶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닙니다. 신성한 리뚜르기아가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듯이, 오직 믿음과 사랑을 가진 사람만이 거룩한 영성체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은 또한 우리 각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품은 자,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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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축일 - 축일의 발전
The Feasts of the Church - The Development of Feasts
오늘날 우리가 경축하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서 주요한 사건들을 경축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초기부터 제정되었던 것은 아닙니다. 초대 교회의 신자들은 어떤 특정한 날짜와 성가를 연관시키지는 않으면서 교회에 현존하시는 주님의 진정한 사건으로서 그 사건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기념했던 것입니다. 이후에 교회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신자들이 자유롭게 하느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교회는 매년 교회의 삶의 다양한 사건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의 사건들을 연중 축일로 정하여 그분을 아버지와 성령과 함께 기도와 성가와 말씀 봉독으로 찬양하고 기념하기로 결정하였던 것입니다. 다만 초기 교회의 첫 신자들이 이를 지키고 경축하지 못한 주된 이유는 교회와 신자들에 대한 박해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교회는 카타콤이라는 지하에 있었습니다. 이곳, 즉 땅의 꽃과 수풀 아래서 신앙과 찬양의 나무가 자랐습니다. 교회는 거창한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의 왕국을 신자들의 가슴 속에 확대시켰습니다. 이 미로와 같은 땅 속 카타콤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태어나는 장소였을 뿐만이 아니라, 또한 그들이 삶을 마치고 묻히는 곳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살아계신 하느님의 교회를 “진리의 기둥이며 터전”으로 만들어 왔던 초대 그리스도 교회의 투쟁과 신앙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이 글의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첫 3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론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명확한 교회의 양심을 발전시켰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내부의, 또한 외부의 거짓과 싸우면서 수많은 희생으로 신앙과 찬양의 원칙을 정형화시켰고 지켜냈습니다.
첫 3세기 동안 교회는 땅 속에서 그 뿌리를 키웠고, 카타콤의 수분과 순교자의 피로 그 뿌리에 양분을 공급했습니다. 교회는 그 뿌리를 안티오키아에서 로마로 펼쳐나갔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에페소, 고린토, 테살로니카, 아테네도 헌신과 희생의 횃불로 그리고 그리스도인 인격과 양심의 양성으로 덥혀지고 밝아진 그리스도교 신앙의 땅 속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결실의 시간이 왔을 때, 즉 뿌리가 그 썩지 않는 줄기를 땅 위로 내어놓을 준비가 되었을 때, 그 때 하느님의 섭리로 정치적 환경이 조성되었고 범상치 않는 인물이 준비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스 대제, 그는 종교적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이유로 그리스도의 교회에 신앙과 찬양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습니다. 이 정략적인 행위는 황제에 의해 시작되었고 적용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체들 간의 사랑이라는 힘으로 무장하고 방어와 선교적 열망을 박해를 피해 숨어있는 피신처에서 나왔습니다. 이제 교회는 자유롭게 그 교리를 적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처음 관심은 신앙을 승인하고 지체들을 양육하는 기도와 찬양을 발전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4세기가 교회의 지하 생활과 이후 지상 생활에서의 일련의 과정을 연결시키는 황금의 시기가 되는 이유입니다. 신현축일과 성탄절의 경축, 신성한 전례의 저술, 신경을 통한 신앙의 정형화 등 많은 일들이 4세기에 일어났고, 이 영속적 토대들은 앞서 존재했던 뿌리에서 피어난 꽃처럼 발전했습니다.
교회의 삶은 오늘날까지 이들 시들지 않는 꽃의 향기를 지켜왔으며, 이 향기는 현재 우리가 숨쉬는 값진 그리스도교 대기를 문명 사회에 선사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우리의 손과 가슴에 이 등불과 횃불을 들고 있습니다. 이 빛은 가슴으로 신앙의 유산을 물러주었던 카타콤의 사람들에 의해 타올랐던 그 램프와 횃불로부터 전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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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삶
The Life of the Church
기도는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한 경험이고 예배는 하느님 백성의 가장 근본적인 행위입니다. “기도 없이는 생명이 없습니다. 기도가 없는 곳에는 오직 광기와 공포만 있을 뿐입니다. 정교회의 영혼은 바로 이 기도의 선물 안에 있습니다.” (바실리 라조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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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안에서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Encountering Christ in Worship
정교 그리스도인은 육신이 되신 하느님 말씀에 강하게 결부된 달력에 따라 살아가고 시간을 구분합니다. 매년, 매달, 매주, 그리고 저녁과 함께 시작되는 매일의 순환 주기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 그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것들은 또한 하느님의 말씀께서 육화하셨고 우리 가운데 사셨던 결정적이고 숭고한 순간들, 그분이 태어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순간들로 이뤄집니다. 우리의 구원이 토대로 삼고 있는 이 행위들과 사건들은 단번에 모두를 위해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시간의 리듬과 흐름 안에서 그것들은 다시 기억되고 경축되고 새롭게 경험됩니다. 모든 전례 안에서 우리는 단 한번 죽으시고 지금 영원히 살아계신 그리스도, “어제나 오늘이나 또 영원히 동일하신”(히브리서 13:8)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모든 전례 안에서 그분은 과거의 구원 사역과 그것의 성취를 현재적인 것으로 만드십니다. 시간의 흐름 안에서 예배는 우리를 시간의 끝으로 인도합니다.(마태오 18:20) “아버지와 함께 높은 곳에 좌정해 계시는” 그분은 “또한 보이지 않게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신성한 리뚜르기아의 기도문)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떠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세상 끝나는 날까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마태오 28:20)
교회는 그 선포와 복음과 성사들을 통하여 그분의 피조세계와 연합하시도록 “피조세계의 주님”을 부릅니다. 새로운 세상은 이 세상의 지혜자들에게는 알려지지 않은 신앙의 신비 안에서 저절로 자라납니다.(1 고린토 1:19-21ㅡ 2:6-9) 일반적으로 예배 그리고 특별히 성사들은 우리를 미래의 세상 하느님 나라로 들어서게 합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생명의 구원하는 행위 안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은 우리를 만드신 그분과의 닮음 안에서 끊임없이 새로워지고 개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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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기억하며 하루를 지냅니다
We spend the day remembering the Lord
일출과 일몰, 매주, 매달, 매해의 주기적 반복 안에서, 우리가 공통되게 가지는 매일 매일의 시간 경험은,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생명과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의 삶을 표현하기 위해전례적인 시간 안에 통합되었습니다. 낮과 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구성되는 시간은 새로운 의미, 새로운 장중함, 새로운 절박감을 얻습니다. 매일은 은총의 날이, 매년은 주님의 해가 될 가능성을 가집니다. 이 말의 의미는 곧 매일 매년이 하느님과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하셨고 또 계속해서 행하시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동시에 그분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모든 풍요함을 기쁨을 선취할 수 있도록 해주는(2 고린토 2:9) 적합하고도 결정적인 순간들(카이로스)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루, 주간, 달, 해라고 하는 네 개의 상관된 차원 위에서 움직이는 전례 주기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신비 안에 합체시켜주고, 그리하여 우리가 살고 행동하는 시간(크로노스)를 우리 구원의 결정적인 시간(카이로스)로 변모시켜줍니다. 매일은 우리의 현존 전체의 형상이 됩니다. 우리가 매일을 조직하고 사용하는 방법과 그 매일이 둘러싸고 있는 우리 삶의 우선성은 각 개인의 삶의 질을 알려주는 표시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매일은 영원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실존일 수 있고 또 그러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초기 그리스도교 저자인 오리게네스의 말처럼, “주님이신 하느님 말씀(Divine Logos)에 따라 언제나 말하고 일하고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느님의 날 안에서 살아가고, 끊임없이 ‘주님의 날’들을 지킵니다.”
모든 자연 현상 중에서 인간의 삶에 있어서 해가 지고 뜨는 것보다 더 뚜렷하고 중심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빛이 나타나고 사라지는 것은 단순한 자연적 우연 그 이상의 것입니다.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은 언제나 빛으로 경험되기 때문입니다. “어둠 속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겠고 죽음의 그늘진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리라.”(마 4:16) 그래서 일몰과 일출의 시간은 기도하기에, 죄와 부패와 죽음의 어둠을 흩으시는 세상의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입니다. 공동체 예배 혹은 개인적인 묵상과 기도가 드려지는 매일 저녁과 아침, 신심 깊은 신자는 빛이신 그리스도의 상징적 표현으로 등잔을 밝히고 기쁨과 감사로 화사한 빛이시고 기쁘고 따뜻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신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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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예식들
Daily Services
성사 이외에 정교회의 매일 예배는 주되게는 저녁 기도 예식인 만과와 아침 기도 예식인 조과로 구성됩니다. 이 두 예식은 정교회의 매일 예배에서 가장 길고 가장 잘 구성된 예식입니다. 이에 더하여 매일 예식은 네 번의 시과(1시과, 3시과, 6시과, 9시과), 석후과, 심야과를 포함합니다.
시과들은 고대에 이름 붙여진 하루의 시간 간격들, 1시(일출), 3시(오전 9시경), 6시(정오), 9시(오후 3시경)에 조응합니다. 이중 1시과는 실상 조과의 확장입니다. 그래서 보통 조과와 함께 드려집니다. 각 시과의 중심이 되는 기도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되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이에 더하여, 각 시과는 3편의 시편과 성가들 그리고 각 시과에 고유한 기도문들을 포함합니다. 각 시과는 특별한 주제들을 가지고, 때로는 그리스도의 사건과 구원의 역사의 어떤 측면에 초점을 맞춘 배경 주제들을 가집니다. 각 시과의 일반적인 주제를 보면, 1시과는 참된 빛의 오심을, 3시과는 오순절 성령의 강림을, 6시과는 주님의 십자가에 달리심과 수난을, 9시과는 주님의 죽으심과 묻히심을 기념합니다.
석후과는 저녁 식사 후 잠자리에 들기 전에 드리는 예식입니다. 이 예식은 세 가지 주제에 초점을 둡니다. 먼저 지나간 하루에 대한 감사가 있습니다. 밤 동안의 보호를 간청합니다. 그리고 낮 동안에 행한 잘못에 대한 용서를 간구합니다. 심야과는 명칭이 말해주듯 한 밤중(자정)에 드리는 예식입니다. 기술의 발전과 노동과 수면 습관의 변화로 인해, 이 예식은 요즘 거의 수도원 공동체에서만 제한적으로 드려집니다. 성경에서 한 밤중은 매우 중요한 시간입니다. 깊은 밤에 일어났던 중요한 사건들 중에는 우리 주님의 부활 사건이 있습니다. 성경은 또한 한 밤중에 주님의 재림 파루시아가 일어날 것이라고 암시합니다.(마태오 25:26, 1 테살로니카 5:24) 이 예식은 바로 이러한 주제들로 구성됩니다.
여덟 개의 매일 예식은 고정된 요소들은 ????매일 예식서????(Horologion)라 불리는 전례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루 동안 이렇게 자주 매일 예식을 드리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있어서 구원의 유익한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이러한 전례적 신심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기억할 때, 그것은 우리의 삶 전체가 죄로부터 보호받게 해주고, 매일의 모든 활동과 노동을 복되고 거룩한 것으로 만들어 줍니다. 히폴리투스는 자주 기도를 실천하는 신자들이 얻는 커다락 유익을 다음과 같은 말로 강조합니다.
“… 만약 그대가 이렇게 행동하고 이런 것들을 명심하고 또 다른 이들에게도 이것들을 가르쳐 준다면, 그대는 항상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가지게 될 것이므로, 유혹을 받을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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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의 역사
History of the Orthodox Church
교회는 어떤 성현이나 집단 혹은 어떤 행위 규범이나 종교 철학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에게서 비롯됩니다. 정교회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졌고, 성령에 의해 생동하게 되었던 사도 공동체에 기원을 둔다고 믿습니다. 부활 대축일 후 50일째 되는 날 경축되는 오순절 성령강림대축일은 성령께서 사도들 위에 충만하게 임하시어, 비로소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역이 시작된 사건을 기념합니다. 정교회는 정교회야말로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통해 태어난 그리스도의 교회와 사랑과 믿음과 직제에 있어서 직접적이고 깨어지지 않은 연속성을 보존해 왔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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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시대
Persecution
사도행전과 사도 서신들에 묘사된 최초의 교회는 자신을 유대 땅의 경계 안에 가두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온 세상에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우리 주님의 명령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분의 구원을 가져오는 죽음과 부활의 사건은 단지 1세기 지중해 세계에 속해있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지역 모든 시대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부활 이후 불과 몇 년 만에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로마 제국의 모든 주요 도시로 퍼져나갔습니다.
초기 교회가 유대교와 이교로부터 많은 개종자를 받아들였던 반면, 복음이 선포된 세상은 성 바울로의 말처럼 “비정하고 무자비한” 세상이었습니다. 몇 번의 아주 짧은 평화의 시기를 제외하고 교회는 첫 3세기 동안 로마 제국 전체에서 끊임없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신앙과 사랑은 로마제국의 종교와 정치체제에 큰 위협으로 간주되었습니다. 수 백만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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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시대
A Time of Growth
4세기 초는 교회의 발전에 새로운 국면을 열어주었습니다. 로마 제국 황제들의 주도로 자행된 악랄한 박해의 세기들 끝에, 로마의 한 황제 콘스탄티노스 대제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313년에 그리스도교에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습니다. 이 칙령은 교회가 박해에서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제국에서 아주 중요한 힘이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었습니다. 그 후 계속해서 교회와 제국은 서로 매우 밀접하고 유익한 관계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제국의 지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구 로마 제국을 특징지었던 악습들 또한 그리스도교 비잔틴 시대에 와서 엄청나게 축소되었습니다. 교회는 정말 교회가 속해있던 사회의 누룩이었습니다. 4세기에서 10세기까지의 기간은 교회의 내적인 발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신약성경의 권위 있는 표준이 결정되었고, 예배는 뼈대와 구조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들은 교회의 “아버지들(교부들)”이라고 알려진 위대한 목자들과 신학자들에 의해 발전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또한 강력한 선교의 시기였습니다. 그중 제일 중요한 것은 성 끼릴로스와 성 메토디오스에 의해 슬라브족이 복음화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라고 해서 투쟁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비잔틴 제국은 이웃하고 있는 페르시아와 이슬람 세력에 맞서 늘 경계해야만 했습니다. 내적으로도 교회는 많은 중대한 분열과 이단들로 인해 고통을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431년과 451년에 중대한 분열이 일어났습니다. 가장 중요한 이단 중에는 아리오스주의가 있었습니다. 이 이단은 그리스도께서 참된 하느님이 아니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이단은 교회를 크게 괴롭혔고 거의 한 세기 동안 제국 전체에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교회의 근본적인 교리는 일곱 번의 세계 공의회에 의해 선언되었고 수호되었습니다. 열렸던 지역의 이름들이 붙어있는 이 주교회의(시노드)들은 육화와 성 삼위 하느님에 대한 올바른 가르침들을 확증하기 위해서 세계 각처에서 모여든 주교들을 포함했습니다. 공의회들은 새로운 교리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교회가 언제나 믿어오고 가르쳐왔던 것을 특별한 장소와 시대 상황 속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선언했던 것입니다. 초기 교회의 세계 공의회들과 다른 여러 시노드들을 통해서 드러난 교회적 삶의 공의회적이고 협의적인 표현들은 계속해서 정통 그리스도교(정교)의 중요한 특징을 이루어 왔습니다.
세계 공의회들은 또한 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그리고 예루살렘이라는 다섯 개의 중심을 가진 교회의 구조를 승인했습니다. 이 도시들의 대주교들은 총대주교로 인정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특정 지역을 아우르는 지역 공의회(시노드)를 주재합니다. 초기 교회는 한 가지 색깔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각 중심들은 고유한 신학 유형들, 관습들 그리고 예배 전통들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교회는 신앙의 통일성을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기 시대부터, 제국의 수도였던 로마의 주교에게는 영예의 수위권이 부여되었습니다. 2차 세계 공의회(381)는 “콘스탄티노플의 주교는 로마의 주교 다음으로 영예의 특권들을 소유한다. 콘스탄티노플은 새 로마이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콘스탄티노플 주교에게도 영예로운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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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분열
The Great Schism
대분열은 서방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방 정교회 간의 분열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대분열은 11세기에 일어났습니다. 동방과 서방이라는 두 위대한 전통의 관계는 4세기부터 자주 삐걱거려 왔습니다. 하지만 신학적 표현과 전례적 관습 그리고 권위의 관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통일성과 조화는 유지되었습니다. 하지만 9세기 경, 정치적 환경, 문화적 균열, 교황의 요구와 주장 그리고 서방 교회에서 니케아 신조에 ‘필리오쿠에(Filioque)’를 삽입한 것 등으로 인해서 차이는 점차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필리오쿠에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고 주장합니다. 교황의 법적 수위권 주장과 필리오쿠에는 동방에 의해 강력하게 거부되었습니다.
분열의 정확한 연대를 확정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1054년 상호 파문장이 교환되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특별히 1204년 서방 십자군에 의해 자행된 콘스탄티노플 약탈 사태는 두 전통이 소원해지고 불신해가는 과정에서 최종적인 요소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 시기 이후로 로마의 교황을 중심으로 한 서방 교회와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를 중심으로 한 동방 교회는 서로 갈라져 각자 다른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1274년과 1439년 일치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더 이상 일치를 회복할 수 없었습니다. 정치적, 문화적, 정서적 요소들이 언제나 개입되어 있지만, 정교회는 계속된 분열의 두 가지 주요 원인은 교회론에 있어서 교황의 보편적 관할권과 무오류성 주장 그리고 서방 교회에 의해 니케아 신경에 삽입된 ‘필리오쿠에’가 함축하고 있는 교리적 신학적 문제라고 믿습니다.
그 후 거의 500백 년 동안 이 두 전통은 서로 고립된 채 살아왔습니다. 다만 1960년대 초부터 깨어진 일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발걸음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1965년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와 교황 바오로 6세가 서로 파문을 취소한 것은 가장 의미 있는 사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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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시대
A Time of Strife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이슬람 세력의 침공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수도의 함락과 함께 비잔틴 제국도 종말을 고했습니다. 광대한 소아시아 대륙은 비그리스도인들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이미 그 이전 세기에 이슬람의 정치적 지배를 받게 된 그리스도교의 위대한 중심지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에 이어 이제는 콘스탄티노플마저도 같은 신세가 되었습니다. 오토만 제국의 지배 아래서 그리스도인들은 2등 시민으로 취급되었고, 그래서 더욱 무거운 세금을 지불하고, 의복도 구별되게 입어야만 했습니다. 발칸 지역과 소아시아에서 정교회의 삶은 강압과 압제 속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순교를 당했고, 총대주교들은 파면되고 살해되었습니다. 성당들과 수도원들, 그리고 학교들은 폐쇄되었고 파괴되었습니다. 1821년 그리스의 해방과 함께 잔혹한 몇 가지 관습은 끝났습니다. 하지만 20세기 초까지도 일련의 사악한 대학살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소아시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기본적인 인권조차도 부정당하고 있습니다.
비잔틴 제국의 멸망 이후 러시아 교회는 거의 500년 동안 번영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자 정교회는 전투적인 무신론자들의 신념과 정치 체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성당은 폐쇄되었고, 10세기 이후 정교회에 깊이 물든 땅 러시아에서 그리스도교를 제거해버리기 위한 정책이 개시되었습니다. 두 번의 세계 대전 사이에 러시아의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극도의 잔인하고 파괴적인 박해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1943년이 되어서야 겨우 일정한 수준에서 교회를 허용하는 정부 정책의 변화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옛적 동방 그리스도교의 자긍심과 영광이 넘쳤던 땅의 많은 곳에서, 정교회는 수많은 난관과 박해 속에서 투쟁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최근의 몇 세기 동안에 초기 교회 박해 시기보다 더욱 많은 순교자들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불의와 모욕에도 불구하고, 신앙은 살아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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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과 화해의 시대
A Time of Revival and Reconciliation
20세기 초부터 정교회는 에큐메니칼 운동(교회 일치 운동)에 헌신해 왔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일치를 위한 이 같은 행동은 초기 교회 시대 이래로 분열에 대한 가장 대담한 반응입니다.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은 1920년의 회칙을 통해서 일치를 위한 운동에 강력한 영감을 불어넣었을 뿐만 아니라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창설에 주요한 주체로 참여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일치 문제는 영원히 기억되실 아테나고라스 총대주교의 특별한 관심사였습니다. 그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참된 대화를 시작하기 위해, 그리고 다양한 정교회 안에서 형제적 친교의 감각들을 새롭게 하고 진작시키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쓰셨습니다. 1968년 총대주교는 미래를 내다보고 “자비로우신 주님께서 가능한 한 빨리 우리의 거룩한 동방과 서방 교회들에게 다시 함께 신성한 리뚜르기아를 거행하고 함께 친교하는 은총을 주실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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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의 가르침
Orthodox Teachings
정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우시고 성령께서 인도하신 사도적 공동체와의 신앙과 사랑의 연속성을 세대를 거치면서 계속 지켜 왔습니다. 정교회는 정교회야말로 사도 시대로부터 이어오는, 오류와 왜곡에서 자유로운 역사적인 그리스도 신앙을 보존하고 가르쳐 왔다고 믿습니다. 또한 정교회의 가르침 안에는 진리와 반대되는 것, 하느님과의 참다운 연합을 방해하는 것은 조금도 없다고 믿습니다. 종종 동방 그리스도교를 특징짓는 고대성과 불변성은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에 충실하게 남아있으려는 정교회의 바램을 표현해줍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교회는 분리될 수 없다고 정교회는 믿습니다. 교회를 떠나서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성 삼위 하느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도, 그리스도인이라 여겨지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바로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선포되고 지탱되고, 교회를 통해서 한 개인은 신앙 안에서 양육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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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시
Revelation
정교회에서는 모든 신앙의 원천이 하느님께 있습니다. 정교회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셨다고 믿습니다. 특별히 우리가 하느님의 아들로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안에서 말입니다. 하느님의 이 계시, 그분의 사랑, 그분의 목표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끊임없이 교회의 삶 안에 동시대적인 것으로 드러납니다.
정교회 신앙은 인간의 종교적 사색이나 이른바 하느님 존재의 ‘증명’에서 비롯된 것도, 신에 관한 인간의 질문에서 비롯된 것도 아닙니다. 정통 그리스도교(정교) 신앙의 기원은 하느님의 자기 계시입니다. 매일 교회에서 거행되는 조과는 “하느님 주께서 우리에게 나타나셨나니,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가 찬미 받으시도다.”라는 선포를 통해서 우리에게 이것을 확신시켜주고 되새겨줍니다. 하느님의 내적 존재는 항상 알려지지 않고 다가갈 수 없는 것으로 남아있지만, 하느님께서는 또한 자신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분을 아버지로, 아들로, 성령으로 경험해왔습니다. 정교회 신앙의 중심에 있는 성 삼위 하느님 교리는 종교적 사색의 결과가 아니라 하느님에 대한 초월적 경험의 결과입니다. 교리는 오직 한 하느님이 계시고, 그 안에 구별되는 세 위격이 계신다고 가르칩니다.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을 만날 때, 참으로 하느님과 접촉하는 경험을 합니다. 성 삼위 하느님은 결코 완전하게 이해될 수 없는 신비이지만, 정교회는 우리가 교회의 삶을 통해서, 특별히 감사의 성찬 예배와 성사들, 그리고 준성사 예식들을 거행함을 통해서, 성 삼위 하느님 안에 참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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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The Incarnation of Jesus Christ
성 삼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더불어, 육화의 교리는 정교회의 가르침에서 중심 자리를 차지합니다. 정교회 신앙에 따르면, 예수는 경건한 사람이나 심오한 도덕적 스승 그 이상의 존재이십니다. 그분은 “사람의 아들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이십니다. 육화 교리는 그리스도에 대한 교회의 체험을 표현합니다. 그분 안에서, 신성은 인성과 연합됩니다. 그 연합 안에서 이 두 실재는 그 어느 것도 파괴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와 성령과 동일한 본질을 공유하시는 참 하느님이십니다. 게다가 그분은 인간적인 모든 것을 우리와 함께 공유하시는 참 인간이십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하신 하느님-인간으로서 인류가 하느님과 친교하도록 회복하셨다고 믿습니다.
성 삼위 하느님을 드러내시고, 인간의 참된 삶의 의미를 가르치시고, 자신의 부활을 통해서 죄와 죽음의 권세를 정복하신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의 삶을 통하여 성령에 의해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현존해오셨고, 이를 통해 자기 백성을 향하신 성부 하느님의 사랑의 최고의 표현이 되셨습니다. 교회의 위대한 교부들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다음과 같은 대담한 주장으로 요약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게 하시려고 우리와 같아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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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Holy Scripture / Holy Bible
성경은 정교회에서 매우 중요하고 고귀하게 여겨집니다. 성경의 중요성은 매일 매일의 예배와 예식에서 성경의 일부가 반드시 봉독된다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표현됩니다. 성경의 수호자요 참된 해석자를 자처하는 정교회는 성경이 하느님 계시에 대한 가치 있는 증언들이라고 믿습니다. 구약성경은 고대 이스라엘에 주어진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표현하고 있는, 다양한 장르의 문학 형태로 된 49권의 책들의 모음입니다. 정교회는 구약성경을 그리스도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으로 여기기에, 그것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계시의 빛 아래서 읽혀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과 초기 교회 안에서의 성령의 충만한 강림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네 개의 복음경은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 특별히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서술입니다. 21개의 사도들의 편지와 사도행전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 그리고 초기 교회의 발전을 다룹니다. 묵시록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하는 매우 상징적인 글입니다. 신약성경, 특별히 복음경은 정교 신앙에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아들의 육화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가 이뤄졌음을 알려주는 ‘기록된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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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Holy Tradition
성경이 하느님 계시에 대한 가치 있는 기록물로서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그 계시 전체를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하느님 백성의 계속된 삶 속에 주어진 하느님 계시의 한 가지 표현일 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은 전통이라고 불리는 신앙의 보고의 일부입니다. 전통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해져 온”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 안에 기록된 신앙의 증언에 더하여, 정통 그리스도교(정교) 신앙은 감사의 성찬 안에서 기념되고, 교부들에 의해 가르쳐지고, 성인들에 의해 영광을 받고, 기도와 성가와 성화(이콘) 안에 표현되고, 일곱 번의 세계 공의회를 통해서 수호되었고,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 안에 요약되었고, 사회와의 관계 안에서 발현되고, 그리고 성령의 능력에 의해 정교회의 모든 지역 공동체 안에서 삶으로 구현됩니다. 성 삼위 하느님의 생명은 교회의 삶의 모든 측면에서 드러납니다. 마지막으로 교회는 그 전체로서 이 계시를 증언하는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의 수호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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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와 신경
Councils and Creeds
하느님 계시를 교회의 삶의 어떤 한 차원으로 축소시키려는 그 모든 경향을 피했듯이, 교회는 또한 그 신앙에 대한 대대적이고 체계적인 정의를 피해왔습니다. 정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하느님과 인류의 자애롭고 신비로운 관계를 표현하고 가리킨다고 확신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새로운 철학이나 교의체계를 제정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성 삼위 하느님 안에 있는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 현실은 어떤 언어나 어떤 공식이나 어떤 정의로 완전하게 포착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신앙의 내용은 이성에 반대되지 않지만 종종 이성의 한계를 넘어섭니다. 삶의 주요한 진실들 중 많은 것들이 그러하듯 말입니다. 정교 신앙은 하느님의 존귀와 위엄의 초월성을, 인간 정신의 한계와 함께 인정합니다. 교회는 하느님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신비의 요소들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신앙의 근본적인 진리들이 거짓 가르침에 의해 심각하게 위협받을 때만, 교회는 어떤 신앙의 조항을 교리적으로 정의하기 위해 행동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분열 이전의 고대 교회의 일곱 번의 세계 공의회의 결정들은 매우 높이 존중받습니다. 공의회은 참된 신앙을 정의하기 위해 그리스도교 세계 모든 곳의 주교들이 함께 모인 ‘주교회의(시노드)’입니다. 세계 공의회들은 새로운 교리들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교회가 이미 이전부터 믿어오고 가르쳐왔던 것을 특정한 장소와 시대에 선포했던 것입니다.
325년 니케아 공의회와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작성되고 선언된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그 후로 정교회의 근본적인 신앙의 가장 권위 있는 표현으로 인정되어 왔습니다. 신경은 종종 “신앙의 상징”(Symbol of Faith)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상징’이라는 표현은 신경이 어떤 분석적인 글이 아니라, 신경보다 더욱 위대한 어떤 현실을 가리키고 있으며 신경은 단지 그것에 대한 미약한 증언일 뿐이라는 것을 지시합니다. 그 후 계속해서, 신경은 정통 신앙의 척도, 그리스도교 교육의 기초가 되어 왔습니다. 신경은 세례 성사 때 그리고 신성한 리뚜르기아가 거행될 때 큰소리로 고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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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
Nicene-Constantinople Creed
-.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 전능하시고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을 믿나이다.
-. 그리고 또 오직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세대에 앞서 성부로부터 나신 하느님의 외아들이시며 빛으로부터 나신 빛이시요, 참 하느님으로부터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창조되지 않고 나시어, 성부와 일체이시며 만물이 다 이분으로 말미암아 창조되었음을 믿나이다.
-. 우리 인간을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 오셔서 성령으로 또 동정녀 마리아께 혈육을 취하시고 사람이 되심을 믿으며,
-. 본디오 빌라도 시대에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묻히심을 믿으며,
-. 성경 말씀대로 사흘 만에 부활하시고,
-. 하늘에 올라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시며,
-.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영광 속에 다시 오시리라 믿나니 그의 나라는 끝이 없으리이다.
-. 그리고 주님이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나니,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시며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같은 흠숭과 같은 영광을 받으시며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나이다.
-. 하나인 거룩하고 보편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를 믿나이다.
-.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세례를 알고 믿나이다.
-. 죽은 이들의 부활과 후세의 영생을 굳게 믿고 기다리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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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들
Sacraments
정교회의 가장 잘 알려진 기도 중 하나는 “어디에나 현존하시며 모든 것을 채우시는” 하느님의 성령에 대해 말합니다. 이 근본적인 확신은 하느님에 대한, 그리고 하느님과 세상의 관계에 대한 정교회의 기본적인 이해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진정 우리와 가까이 계신다고 믿습니다. 비록 볼 수 없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피조세계와 단절해 계시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성령, 이 두 신격을 통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 삶 안에서, 우리가 속한 피조세계 안에서 현존하시고 활동하십니다. 우리의 삶과 우리가 속해있는 피조세계는 하느님을 지향하고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정교회 그리스도인의 공동체적 삶에는 특별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 경험들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행위에 대한 인식은 드높여지고 찬미됩니다. 우리는 이 사건들을 교회의 성사들이라고 부릅니다. 전통적으로 정교회는 성사를 ‘신비(Μυστεριον, 미스떼리온)로 인식해 왔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느님께서 교회의 이 특별한 사건들 안에서 그 백성의 기도와 행위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신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성사들은 하느님을 우리에게 드러내주고 계시해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하느님을 받아들이게 해줍니다. 모든 성사들은 하느님에 대한, 그리고 우리들 서로에 대한 우리 각자의 인격적 관계에 깊이 작용합니다. 성령께서는 성사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고,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 연합시켜주십니다. 성사에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성장하여 점점 더 하느님과 가까워지고 성령의 은총들을 받아 누리게 됩니다. 정교회 신앙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인 이 신화의 과정, 테오시스의 과정은 다른 이들과 고립된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일어납니다. 비록 성사들은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며 거행되지만, 그것은 또한 교회 전체를 포괄하는 표현들입니다. 정교회의 성사들은 기도와 성가와 성경봉독과 몸짓과 행렬 등으로 구성됩니다. 성사예식들의 주요한 요소들은 사도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정교회는 성사들을 특별한 본문이나 행위로 축소해버리는 것을 피해왔습니다. 그래서 성사는 일련의 거룩한 행위들 전체로 구성됩니다. 대부분의 성사들은 피조세계 안의 특정 물질들을 하느님 계시의 외적이고 가시적인 표징으로 사용합니다. 물, 기름, 빵, 포도주는 정교회가 예배에서 사용하는 많은 물질적 요소들 중의 몇 가지 중요한 예에 불과합니다. 피조세계의 물질을 자주 사용하는 것은 물질은 선한 것이고, 성령의 매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통 그리스도교(정교) 신앙의 핵심 진리, 즉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가 되셨다는 것, 그리고 피조세계 한 가운데 들어오시어 온 우주를 창조주 하느님께 영광 돌리는 본연의 소명으로 향하도록 재정립한다는 진리를 확증한다는 점입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에프카리스티아)
Eucharist (Eucharistia)
신성한 리뚜르기아라고도 하는 거룩한 감사의 성찬 예배는 정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중심적인 예배 경험입니다. 종종 “성사들 중의 성사”라고 칭해지기도 하는 이 성사는 교회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경축하는 것으로서, 매주 일요일과 대축일에 봉헌됩니다. 교회의 다른 모든 성사들은 교회의 삶에 있어서 중심에 있는 이 감사의 성찬 예배로 인도되고, 그로부터 흘러나옵니다. 앞의 장에서 우리는 정교회에서 감사의 성찬예배가 어떻게 거행되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미 서술한 바 있습니다.
세례성사
The Sacrament of Baptism
세례 성사는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하나로 결합시켜주고, 성 삼위 하느님의 생명에 들어서게 해줍니다. 물은 삶의 정화와 갱신의 자연적 상징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성 삼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의 물 속에 세 번 들어갔다 나오는 침례를 통해 우리는 죄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으로 태어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분의 승리의 부활과의 공개적인 동일화입니다. 초기 교회의 관습을 따라서 정교회는 유아의 세례를 권장합니다. 유아에게 베풀어지는 세례 성사는 하느님께서 아이를 선택하시어 그 백성의 중요한 일원으로 삼으셨음에 대한 증거라고 교회는 믿습니다. 세례 받은 날부터 아이들은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영적인 삶 안에서 성숙해져 갑니다. 성인의 세례는 대상자가 성 삼위 하느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을 경우에 거행됩니다.
견진성사
Confirmation
정교회에서 견진성사는 세례에 연이어 거행되는 것으로 결코 몇 년 후로 연기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역이 성령에 의해 생동하게 되었고, 사도들의 설교 또한 성령에 의해 강력해졌던 것처럼, 정교 그리스도인 각자의 삶 또한 성령을 통해서 성화됩니다. 각 사람의 개인적인 성령강림사건이라 일컬어지는 견진성사는 특별한 방식으로 성령을 전해주는 성사입니다.
견진성사에서 사제는 이제 막 세례를 받은 사람의 몸 여러 곳을 성유로 발라주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의 은총의 날인입니다.” 주교의 축복과 함께 만들어지는 성유는 성화와 권능의 표징입니다. 성사는 각 사람이 교회의 가치 있는 구성원일 뿐만 아니라 또한 성령께서 이러저러한 은총과 달란트로 축복해주신 존재라는 진리를 강조합니다. 기름 바르는 행위 또한 우리의 몸이 가치 있는 것이며 구원의 과정에 포함된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입문성사들은 항상 새로운 세례신자가 성체성혈을 받아 모시는 영성체로 끝납니다. 그리고 영성체는 신성한 리뚜르기아의 거행 안에서 이뤄지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이러한 관습은 정교회가 어린이들을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바라본다는 것을 드러내줍니다. 너무 어려서 하느님의 백성에 속할 수 없는 그런 나이는 결코 존재하지 않습니다.
고백성사
The Sacrament of Confession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는 서로에 대해 그리고 또한 하느님에 대해 책임을 집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하느님과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는 틀어져 버립니다. 죄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으로부터, 인간으로부터 그리고 하느님의 형상을 닮아가도록 창조된 우리 자신의 참된 자아로부터 소외되는 것이고 멀어지는 것입니다.
고백성사는 우리 죄가 용서받고 하느님과 그리고 우리 이웃과 관계가 회복되고 강화되는 성사입니다. 이 성사를 통해서 우리 주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찢겨진 이들을 계속해서 치유하시고 넘어진 자들에게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회복시켜주십니다. 정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고백신자는 하느님께 고백하고 하느님에 의해 용서받습니다. 고백사제는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 둘 다를 표상하는 성사적 증인입니다. 사제는 심판자가 아니라 의사요 안내자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영적인 아버지를 갖고 그에게 영적인 충고와 권면을 얻는 것은 정교회의 오래된 관습입니다. 고백성사는 얼마든지 거행될 수 있습니다. 다만 그 빈도는 각 개인의 재량에 맡겨집니다. 하지만 심각한 죄를 범한 경우에는 거룩한 영성체전에 반드시 고백성사를 행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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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성사
Sacrament of Marriage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십니다. 남자와 여자를 상호간의 사랑의 관계로 묶어주시는 분도 하느님이십니다. 결혼성사는 바로 하느님의 이 행위에 대한 증언입니다. 성사를 통해서 남자와 여자는 공개적으로 남편과 아내로 결합됩니다. 그들은 상호간, 그리고 하느님과 교회와의 관계에서 새로운 관계성 안으로 들어갑니다. 정교회에서 결혼은 법적인 계약이 아니기 때문에, 결혼성사에서는 서약이 없습니다. 정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결혼은 단순한 사회제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로의 영원한 소명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함께 살아갈 뿐만 아니라 함께 그리스도교적인 삶을 공유하도록 성령에 의해 부름 받습니다. 그래서 각자는 상대방의 도움으로 더욱 성장하여 하느님께 가까워지고, 그래서 본래 그러하도록 부름 받은 신화된 인격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정교회의 결혼 성사에서 부부는 약혼하고 반지를 교환한 후, “영광과 영예의 관”을 씁니다. 이것은 하느님 아래서 새로운 가족이 세워졌음을 의미합니다. 예식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가나의 혼인잔치를 상기시켜주고 그들이 새로운 삶에서 모든 짐과 기쁨을 함께 나눠가질 것임을 의미하는 의식으로, 남편과 아내가 공동의 잔을 함께 나눠 마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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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품 성사
Sacrament of Holy Orders
성령께서는 신품성사를 통해서 교회의 연속성을 지켜주십니다. 신품성사를 통해서, 교회 안에서 선택된 사람은 교회에 의해 교회의 특별한 봉사직으로 따로 세워집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백성을 통해서 서품대상자를 공동체 안에서 목사와 교사 그리고 제단 앞에서 회중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부르시고 세우십니다. 서품된 사람은 그리스도의 백성 안에서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형상입니다. 정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신품성사의 과정은 지역의 회중과 함께 시작됩니다. 하지만 보편 교회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주교 혼자만으로도 이 행위를 완수할 수 있습니다. 주교는 성령의 임재를 간구하는 기도와 서품되는 사람의 머리 위에 그의 손을 얹는 안수를 통해서 그렇게 합니다.
사도적인 교회의 관습을 따라서, 각각 특별한 신품예식을 갖는 세 개의 주요한 품계가 있습니다. 사도들의 계승자인 주교, 그리고 주교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제와 보제가 그것입니다. 각 품계는 사목적 책임에 따라 구별됩니다. 오직 주교만이 서품을 줄 수 있습니다. 종종 다른 칭호와 예식들이 이 세 품계와 결부되기도 합니다. 정교회는 결혼한 사람도 서품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합니다. 하지만 6세기부터 주교는 오직 독신 사제 중에서 선택되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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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유성사(병자성사)
Sacrament of the Anointing of the Sick
사람이 병들거나 고통 중에 있을 때, 외로움과 고립감을 느끼는 삶의 위기의 순간들을 맞습니다. 병자를 위한 성유성사는 우리가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고통 받을 때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이 직무들을 통해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상기시켜줍니다. 그분은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삶의 도전들과 임박한 죽음에 직면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해주십니다.
견진성사에서처럼 이 성사에서도 기름은 하느님의 현존과 능력과 용서의 표징으로 사용됩니다. 치유를 주제로 한 사도경 본문과 복음경 본문이 일곱 개씩 봉독되고, 그에 더해지는 일곱 번의 기도가 이뤄진 뒤, 사제는 신자의 몸에 성유를 발라 줍니다. 정교회는 이 성사를 오직 임종을 앞 둔 사람에게만 베풀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몸이나 마음 혹은 영이 병든 모든 사람에게 제공됩니다. 정교회는 성대주간 성 대 목요일에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이 성사를 베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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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거룩한 예식들과 축복식
Other Holy Rites and Blessings
정교회는 특별히 성사의 숫자를 정한 적이 없습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에 더하여, 교회는 이상에서 언급한 여섯 가지의 신비를 주요 성사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이 성사들은 공동체 전체를 포함하고 있으며, 더 중요하게는 감사의 성찬 예배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밖에도 주요 성사들을 보충해주고 백성의 삶 속에서 교회가 현존하다는 것을 반영해주는 다른 많은 축복식과 예식들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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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예식들과 축복식들
Special Rites and Blessings
교회의 삶의 중심에는, 우리 신앙의 가장 중요한 예배, 성 삼위 하느님의 참된 생명에 우리가 참여할 수 있게 해주는 감사의 성찬 예배가 있습니다. 주요 성사들은 감사의 성찬 예배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백성의 삶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속적으로 현존하심을 확증해줍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와 주요 성사들과 함께, 정교회는 인간의 삶의 다양한 필요와 사건과 임무들과 결부된 많은 수의 특별 예식과 축복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예식과 축복식을 거행함으로써 교회는 끊임없이 우리 삶 속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현존과 사역을 증언합니다. 우리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돌보시고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계신 분이십니다. 전례 예식과 축복식은 또한 삶의 모든 것이 중요하다는 것, 삶의 수많은 사건들과 선물들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정향될 수 있고 또 하느님 안에서 온전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특별 예식들은, 비록 주요 성사로 간주되지는 않지만 그 역시 공동체 예배의 사건이라는 점에서, 종종 준(準)성사라고 일컬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예식들 역시 성 삼위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분명 성사적 특징들을 가집니다. 장례예식, 성수식, 수도서원식 등 몇 개만 보더라도, 이 예식들은 교회의 삶에서 매우 의미 깊은 것들입니다. 여러 가지 축복식들은 경우에 따라 행해지고 반드시 교회 공동체 전체를 직접적으로 포괄하지는 않는 간단한 예식들입니다.
교회는 개인들, 여행과 같은 사건들, 성화, 성당, 꽃, 농지, 동물, 음식 등과 같은 물질적 대상들을 축복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우리의 감사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어떤 선물도 사건도 인간의 책임도 세속적인 것일 수 없고 하느님과 동떨어진 것일 수 없음을 확증합니다.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선한 것이 하느님 안에 그 기원과 목표를 둡니다.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과 관심 밖에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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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예식
Funeral Rites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가족뿐만 아니라 교회 전체에 영향을 줍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표현하고 있는 정교회의 장례 예식은 어떤 감정적인 방법으로 한 개인의 덕행을 칭송하는 기회로 이용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러 기도와 성가는 죽음의 힘을 정복한 그리스도의 승리의 부활뿐만 아니라 죽음의 냉혹한 현실도 강조합니다. 장례 예식은 애도하는 이들을 위로합니다. 또한 교회가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죽은 한 지체를 위해 기도하는 매개가 됩니다. 정교회는 육체적 실존의 종식을 오직 삶의 한 국면의 마감으로만 바라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고,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능력을 확증합니다.
정교회의 장례예식은 세 가지 예식으로 구성됩니다. 먼저 죽음 이후의 철야 예배가 있는데, 보통은 새벽 기상 시간에 거행됩니다. 이 예식은 뜨리사기온 예식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교회는 “당신의 종의 영혼이 고통도 슬픔도 한숨도 없고 영원한 생명이 있는 곳에서 성인들과 함께 안식을 누리게 해달라”고 그리스도께 간구합니다. 교회가 돌아가신 이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동안, 시신에 최대한의 예를 기울입니다. 정교회는 그리스도인의 몸이 거룩하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령의 전이기 때문입니다.
시신은 또한 모든 피조세계의 최종적인 회복을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시신은 매장일에 교회로 옮겨지고, 장례예식은 교회에서 계속 이어집니다. 이상적으로는 신성한 리뚜르기아가 거행됩니다. 장례 예식 후에 회중은 죽은 이와 작별 인사를 나눕니다. 뜨리사기온 예식은 무덤 옆에서 다시 반복하여 거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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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도 예식
Memorial Service
죽음은 교회의 모든 지체들 간에 존재하는 사랑의 연합을 변모시킬 뿐 파괴하지는 않습니다. 정교회는“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 안에서 잠든 이들이”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점점 하느님께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끊임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지체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그리고 서로간의 사랑과 용서의 능력에 신뢰를 둡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돌아가신 신자들의 죄를 용서해주고 그들을 하늘 나라에서 성인들의 무리 안에 들게 해주시길 기도합니다.
정교회는 매번 신성한 리뚜르기아를 드릴 때마다 돌아가신 이들을 기도 안에서 기억합니다. 이밖에도 교회가 죽은 이들을 기억하는 추도예식이 있습니다. 전통에 따라 추도 예식은 죽은 지 3일째, 9일째, 40일째 되는 날에, 그리고 매년 안식한 날에 거행됩니다. 이런 계기 외에도 네 번의 “영혼 토요일”에 돌아가신 모든 신자들을 기억하며 추도 예식이 거행됩니다. 네 번의 영혼 토요일은 대사순절 직전 두 번의 토요일, 대사순절 첫 번째 토요일, 성령강림축일 직전 토요일입니다. 이밖에도 한국 정교회에서는 설날과 추석 등 조상들을 기리는 전통명절에도 추도예식을 거행합니다. 추도예식이 거행될 때, 고인의 가족들은 곡식들을 삶아 만드는 꼴리바라고 하는 음식을 성당에 가져와서 예식이 거행되는 신자석 중앙에 놓인 탁자 위에 올려놓습니다. 여기서 꼴리바는 부활을 상징합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복음 12장 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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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수식(아기아스모스)
Agiasmos (Great Baptism)
정교회의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축일인 신현대축일은 그리스도께서 요르단 강에서 세례 받으실 때 일어났던 성 삼위 하느님의 현현을 기념합니다. 이 사건 안에 담겨진 풍부한 의미를 깨달은 정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신 것은 단지 그분의 공생의 시작을 알려주고 성 삼위 하느님을 계시해준 사건일 뿐만 아니라 또한 온 피조세계가 그리스도의 구속의 영광을 나눠 갖도록 섭리되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례 받으시기 위해 요르단 강에 들어가셨을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났습니다.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구원하시러 오신 그 백성과 자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물로 표상되는 피조세계 전체와 자신을 또한 동일시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의 세례를 통해서 피조 세계의 가치를 드러내셨고 그것을 창조주 하느님께로 정향시키셨습니다. 피조세계는 선하고 하느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대성수식은 신현대축일 전날과 당일 신성한 리뚜르기아에 이어 거행됩니다. 성수식은 우리 주님의 세례 사건과 성 삼위 하느님의 계시를 기념할 뿐만 아니라, 피조세계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화된다는 정교회의 신앙을 표현합니다. 성수식은 우리가 속해있는 인류와 피조세계가 하느님의 성화시키시는 현존으로 충만해지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확증합니다. 장엄한 성수식 후에는 성수를 신자들에게 나눠주어 신현대축일 기간 동안 집을 축복하는데 사용하게 합니다. 신자가 “신현축일 성수”를 마실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세례를 기억합니다. 교회가 한 개인, 혹은 어떤 사물, 혹은 사건을 성수로 축복할 때, 우리는 세례 받은 이들, 그들의 환경, 그들의 책임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화되고 성령을 통해 성부의 나라로 옮겨진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대성수식에 더하여, 소성수식이 있는데, 이것은 언제든 거행될 수 있습니다. 보통 소성수식은 집을 축성할 때, 혹은 매달 첫날, 새 학년도의 시작, 새로운 과업의 시작 등을 계기로 하여 거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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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또끌라시아 축복식
The Blessing of the Five Loaves
다섯 개의 빵 축복식은 삶의 모든 은총에 대한 우리의 감사를 표현하는 간단한 감사 예식입니다. 기름, 포도주, 밀가루 그리고 빵이 예식이 사용되는데, 이것들은 삶에 가장 기초적으로 필요한 것들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축복식은 그리스도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신 사건을 우리에게 기억시켜줍니다. 이 축복식은 보통 만과 중간에 혹은 대축일과 특별한 경우에 신성한 리뚜르기아 후에 거행됩니다. 예식이 끝나면, 빵을 잘라 모든 회중들에게 나눠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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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립찬양(아까티스토스)
Akathistos
정교회는 오직 하느님께만 예배드립니다. 하지만 정교회는 또한 구원의 역사에서 하느님의 중요한 도구였던 특정한 사람들을 공경합니다. 그 중에서도 하느님의 어머니, 테오또꼬스 마리아는 가장 큰 공경을 받습니다. 정교회가 마리아를 크게 공경하는 것은 바로 그분이 성가가 노래하듯 하느님의 아들을 출산하시도록 선택받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모성을 찬양하면서 우리는 당신을 영적인 성전, 테오또꼬스로 드높이나이다. 당신의 태에 머무신 분, 만물을 손에 쥐신 주님께서 당신을 거룩하게 하셨고, 당신을 영화롭게 하셨고, 모두에게 당신을 찬양하라고 가르쳐주셨기 때문이나이다. … ”
정교회가 테오또꼬스 마리아께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시가(詩歌)는 바로 성모기립찬양입니다. 이 예식의 명칭인 그리스 말 ‘아까티스토스’는 앉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한국어로는 기립찬양이라 부릅니다. 그러므로 회중은 마리아에 대한 공경과 그리스도 안에서 얻는 우리 구원에서 그분이 수행하신 고유하고 유일한 역할에 대한 감사로 인해, 예식 내내 일어서서 찬양합니다. 성모기립찬양은 대사순절의 네 번의 금요일에 네 부분으로 나뉘어 거행되고, 다섯 번째 금요일에는 전체가 거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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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기원의식(빠라끌리시스)
The Immaculate Conception (Paraklisis)
빠라끌리시스로 알려진 성모기원의식은 특별히 병들거나 시험을 당하거나 절망에 빠졌을 때 거행됩니다. 다양한 기도들을 통해 주님께 인도하심과 힘과 치유를 간청합니다. 많은 성가와 기도가 테오또꼬스 마리아께 바쳐지고 그녀의 도움을 간청합니다. 정교회는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과 사랑의 연대로, 마리아와 성인들과 돌아가신 모든 신자들과 연합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생에서 우리가 서로에게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듯이, 우리는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인간존재이신 마리아에게도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기도해달라고 요청할 수 있다고 정교회는 믿습니다. 이 믿음이 아래의 성가에서 잘 표현됩니다.
“그리스도 신자들의 굳센 수호자, 창조주의 변함없는 중보자시여, 죄인들의 기원을 저버리지 마시고 당신의 선하심으로 빨리 오소서. 성모 마리아여, 믿음을 갖고 당신께 부르짖으며 찬미하는 우리를 길이 돌보기 위해 오사 중보하소서.”
성모기원의식에는 대기원의식과 소기원의식 두 가지 형태가 있습니다. 소기원의식은 훨씬 간결하여 대부분의 경우 이 기원의식을 거행합니다. 이 두 형태의 성모기원의식은 8월 15일 성모안식대축일 전 14일 동안 거행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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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Spirituality
정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합니다. 복음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에방겔리온(Evangelion)”인데, 이 단어는 문자적으로는 “기쁜(좋은) 소식”을 의미합니다. 정통 그리스도교(정교)의 기쁜 소식은 인간을 향한 하느님의 경계 없고 희생적인 사랑의 선언이요, 인간 존재의 참된 운명에 대한 계시입니다. 복음(기쁜 소식)에 대해 사색하면서, 4세기 니싸의 그레고리오스 성인은 이렇게 썼습니다. “기쁜 소식은 인간이 더 이상 하느님의 나라에서 추방되고 버림받은 존재가 아니라 다시 아들,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나누길 원하시는 최고의 보물은 바로 그분 자신의 생명이라고 정교회는 믿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느님께서 역사 속에서 행동하시고,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선에 참여하고 하느님 나라의 시민들이 되도록 허락하셨다는 확신과 함께 시작합니다. 이 확신은 리뚜르기아의 기도문에서 너무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당신은 우리를 하늘에 이르게 하시고 다가올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기까지 멈추지 않고 모든 일을 행하셨습니다.”
성부 하느님의 사랑의 주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과 사역 안에서 완전하게 표현되고 구현되었습니다. 하느님 아들의 육화의 전체 목적은 인류를 하느님과의 친교로 회복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정교회의 대 스승들과 교부들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과 같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와 같이 되셨습니다.”라는 선언을 통해서 이 확신을 끊임없이 재확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빛, 우리의 생명으로 찬양되십니다. 그분의 위격 안에는 인성과 신성의 연합이 있고, 우리는 그 연합을 나눠 갖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분의 삶의 방식 안에는 우리가 좇아가도록 초대된 참된 삶의 모델이 있습니다. 그분의 승리의 부활에는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권세들로부터의 해방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부 하느님은 우리를 되찾으시고, 우리에게 다시 그분의 아들딸들이 되라고 부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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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
Theosis
인간의 근본적인 소명과 목표는 하느님의 생명을 나눠 갖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살도록 하느님에 의해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강생하신 사건은 인간으로 하여금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다시 성부께로 올라갈 수 있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정교회는 그리스도인들 각자가 하느님을 향해 나아가는 운동에 속해있다고 믿습니다. 그 운동이 바로 테오시스 즉 신화(deification)입니다.
테오시스는 각 사람이 좀 더 완벽해지고, 좀 더 거룩해지고, 좀 더 하느님과 연합되어가는 영적인 순례여정을 표현합니다. 그것은 결코 정지된 상태가 아닙니다. 또 죽음 이후에만 일어나는 것도 아닙니다. 반대로 모든 그리스도인들 각자에게, 테오시스는 세례와 함께 시작되고, 내생뿐만 아니라 이생 전체를 통해 지속되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운동입니다. 구원은 죄와 죽음과 악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구속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되사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교에서 구원과 구속은 신화(테오시스)의 맥락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적 삶에 대한 이 같은 풍부한 전망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성 베드로가 그의 두 번째 서신의 서두에서 “하느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라”고 한 권면에 아주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또한 인간은 신이 되라는 명령을 받은 피조물이라는 성 대 바실리오스의 말을 통해서도 그것은 강력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분명 이것은 올바르게 이해되어야 하는 대담한 주장입니다. 정교회는 테오시스를 언제나 숨겨져 있고 알려지지 않는 하느님의 본질이 아니라 하느님의 에너지와의 연합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경험은 이것이 하느님과의 참된 연합임을 증명해줍니다. 그것은 결코 범신론적이 연합이 아닙니다. 이 연합 안에서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은 여전히 그 고유의 특징들을 보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교회는 인간의 삶은 오직 그것이 신적인 것이 될 때 그 완성과 충만에 도달함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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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The Holy Spirit
그리스도인과 하느님의 점점 깊어지는 연합은 어떤 마술적이고 자동적인 과정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모두를 위해 죄와 죽음과 악의 권세를 멸하셨지만, 이 승리는 또한 성령에 협력함을 통해서 각자에 의해 자신의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각 사람은 바로 성부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인간의 삶의 충만을 실현하기 위해, 생명을 주시고 자유케 하시는 성령과 동역하도록 부름 받습니다. 성령께서는 신화의 동인으로서 우리를 성 삼위 하느님의 생명 안에 결합시키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또한 우리 각자가 창조될 때 우리 안에 주어진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을 완전케 함에 있어서, 언제나 우리 인간의 자유를 인정하시고 우리의 능동적인 협력을 요구하십니다.
우리가 성 삼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 즉 우리의 신화는 교회 안에서 일어납니다. 정교 신자에게, 교회는 하느님과 그분의 백성의 만남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성령과 교회는 유기적으로 결부되어 있습니다. 2세기, 성 이레네오스는 “교회가 있는 곳에 성령이 있고, 성령이 있는 곳에 교회가 있습니다.”라는 말로 이것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의 공통 본성을 계시하기 위해, 또 우리를 성부 하느님과 연합시키시기 위해 교회의 삶을 통해 일하십니다. 우리는 감사의 성찬 예배의 거행과 영성체를 통해서, 성사들에 참여함을 통해서, 매일 기도 규칙을 준수함을 통해서, 금식의 실천을 통해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통해서 성령을 얻습니다.
주님이시며 생명의 수여자로 영광 받으시는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완전에 이르게 하시기 위해, 또 우리를 책임 있고 사랑하는 인간 존재로 만드시기 위해, 교회의 삶 안에 현현하십니다. 예배의 열매는 성령의 선물(은사)들입니다. 사도 바울로는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선물들을 이렇게 열거합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분명 이것은 그리스도교적 삶의 덕들입니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증명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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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과 교회
The Individual and the Church
테오시스는 그 자신을 우리와 나누고자 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할 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관점을 표현합니다. 각 사람은 하느님과의 고유한 관계를 맺도록 해주는 아주 중요하고도 천부적인 자질과 능력을 가진다고 정교회는 믿습니다. 인간은 결코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로 여겨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형상”은 죄로 인해 왜곡될 수는 있을지언정 완전히 제거될 수는 없습니다. 교회의 삶을 통해서 성취의 기회는 언제나 존재합니다. 성사들은 언제나 각 개인을 이름으로 부르며 거행됩니다. 이 행위는 단지 우리에게 각 개인의 존엄성을 일깨워줄 뿐만 아니라 또한 각 개인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져야 하는 책임성을 강조합니다.
정교회가 인간의 가치를 승인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고립된 존재 혹은 자족적인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각 개인은 교회의 중요한 구성원이 되도록 부름 받습니다. 정교회는 교회의 한 부분으로 참여하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믿습니다. 신화의 과정 또한 공동체적인 삶의 맥락 안에서 전개됩니다.
교회 안에서 하느님과 연합되는 것은 우리 각자의 고유한 인격이 제거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비인격적인 힘이나 권세에 사로잡히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참되고 가치 있는 모든 사랑이 그렇듯이, 우리 각자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십니다. 그분의 사랑은 파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 자신의 참된 자아를 드러내고 발전시키고 완전하게 하십니다. 하느님의 생명에 들어감으로써, 우리는 본래 하느님께서 의도하신 바의 인간 존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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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리뚜르기아
The Three Liturgies
오늘날 거행되는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역사적 발전의 산물입니다. 리뚜르기아의 근본 핵심이 되는 요소는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세기를 거치면서 이 핵심 요소에 여러 기도문과 성가와 몸짓들이 추가되어 왔습니다. 리뚜르기아는 9세기 경에 기본적인 뼈대가 완성되었습니다.
정교회에는 현재 세 가지의 리뚜르기아가 거행되고 있습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스 리뚜르기아 : 가장 자주 거행되는 리뚜르기아입니다.
성 대 바실리오스 리뚜르기아 : 일 년에 열 번 거행됩니다.
성 야고보 리뚜르기아 : 성 야고보 축일인 10월 23일에 거행됩니다.
각 성인의 이름을 딴 리뚜르기아라 할지라도, 이 성인들이 전례문 전체를 만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전례문의 주된 기도문들(특별히 아나포로(Aναφορα)로 알려진 봉헌 기도문)이 그분들의 것이라는 것은 거의 분명합니다. 몇 가지 성가와 기도문은 다르지만, 이 세 가지 리뚜르기아의 구조와 기본 요소는 거의 동일합니다.
이 리뚜르기아들 외에, 또한 ‘미리 축성된 리뚜르기아’가 있습니다. 이것은 온전한 감사의 성찬 예배로 보기는 어려운 예배으로서, 저녁 기도 예식인 만과에 이어서 직전 주일에 축성되어 보관해 둔 성체성혈을 영하는 예식입니다. 이 리뚜르기아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감사의 성찬 예배를 온전한 방식으로 드리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철저한 금식 기간인 사순대제와 성대주간의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거행됩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는 복음에 있어서 가장 중심이 되는 이 깊은 기쁨,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고 표현합니다.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하루에 오직 한번만 거행됩니다. 이러한 전통은 지역 교회 공동체의 통일성을 강조하고 유지케 해줍니다. 일요일(주일)과 대축일에는 언제나 감사의 성찬 예배가 거행되고, 평일에도 필요하다면 거행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회중의 참여 없이 사제 혼자 개인적으로 거행될 수 없습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는 보통 아침에 거행되지만, 주교의 축복으로 저녁에 봉헌될 수도 있습니다.
리뚜르기아의 행위들
Acts of the Liturgy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예비신자들의 리뚜르기아와 세례신자들의 리뚜르기아가 주된 구성부분이고, 이 두 부분에 앞서 준비예식이 거행됩니다.
신성한 리뚜르기아에는 많은 상징적 해석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의미들은 행위들과 기도들에서 발견됩니다.
준비 예식
리뚜르기아가 시작되기 전에, 사제는 기도로 자기 자신을 준비하고, 이어서 제의를 입습니다. 제의들은 그의 성직과 임무들을 표현합니다. 그 다음 사제는 지성소 안 제단 왼편에 자리잡고 있는 예비제단으로 가서 프로스꼬미디(봉헌물 준비 예식)를 거행합니다. 거기서 사제는 리뚜르기아에 사용될 봉헌물인 빵과 포도주를 준비합니다. 리뚜르기아에 사용될 누룩 넣은 빵과 포도주는 회중이 봉헌합니다. 이 두 봉헌물은 예식이 시작되기 전에, 신성한 리뚜르기아가 거행되는 동안 기억되고 추념되길 원하는 산자와 죽은 자의 명단과 함께 사제에게 봉헌됩니다. 봉헌은 그리스도, 즉 하느님의 어린 양 곁으로 모인 전체 교회를 상징적으로 표상합니다.
예비신자들의 리뚜르기아
신성한 리뚜르기아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나라가 이제와 항상 또 영원히 찬미되나이다.”라는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됩니다. 이 선언의 말을 통해서 우리는 신성한 리뚜르기아 안에서 교회는 이미 이 땅에 드러난 참된 하느님 나라가 됨을 되새깁니다.
리뚜르기아의 첫 번째 부분은 본래부터 예비신자들을 위해서 고안된 것이지만, 신앙으로 교육받은 이들 또한 매우 교육적인 유익함을 누립니다. 감사의 성찬예배는 또한 다른 예식들과 공통된 요소들을 가집니다. 우리는 거룩한 삼위일체에 대한 공통의 신앙을 나누는 그리스도인으로서 함께 모입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 혹은 사회적 장벽들에 의해 갈라질 수 없는,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백성으로서 노래하고 기도합니다.
소입당은 리뚜르기아의 첫 번째 부분의 중심이 되는 행위입니다. 이때 사제는 복음경을 들고 지성소에서 나와 신자석을 거쳐 다시 지성소로 들어가는 행렬을 거행합니다. 행렬은 우리의 관심을 성경으로, 그리고 또한 복음경을 통한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향하게 합니다. 소입당에 이어서 사도경과 복음경이 봉독되고, 강론이 행해집니다.
세례신자들의 리뚜르기아
초기 교회에는 세례 받은 신자들 중에서도 죄의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들만 리뚜르기아의 이 장엄한 순간에 남아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리뚜르기아의 이 부분을 개시하는 대입당 때 사제는 빵과 포도주 봉헌물을 들고 예비제단에서 나와 신자석을 통과하여 지성소의 제단으로 옮겨놓습니다. 그리고 봉헌 기도가 시작되기 전에, 우리는 서로서로 사랑하여 하나가 될 것을 요청받습니다. 그래서 참으로 완벽하게 우리의 신앙을 고백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평화의 입맞춤이 바로 이 순간에 행해졌습니다. 상징적인 평화의 입맞춤이 행해진 뒤, 우리는 하나가 되어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을 기념하여 행하라고 지시하신 것처럼, 참되게 우리의 봉헌물인 빵과 포도주를 하느님 아버지께 바칠 수 있습니다. 이 봉헌은 위대한 기쁨의 봉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은총을 받아 누리게 하신 하느님의 모든 권능 있는 행위들, 특별히 그리스도의 삶과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봉헌물이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도록, 우리 자신과 우리의 봉헌물 위에 성령을 보내주시길 하느님 아버지께 간청 드립니다. 우리의 감사와 기억을 통해서 성령은 우리 가운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심을 드러내십니다.
사제는 거룩한 선물, 즉 성체성혈을 들고 제단에서 나와, 회중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과 믿음과 사랑을 가지고 가까이 나오라”고 초대합니다. 우리가 감사의 성찬을 나누는 것은 우리들 서로 간의 친교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음을 표현합니다. 신자들은 거룩한 선물에 다가가서, 같은 잔에 담긴 감사의 빵과 포도주,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받습니다. 사제는 영성체 수저로 거룩한 선물을 나눠줍니다. 거룩한 영성체는 우리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에, 영성체는 오직 세례성사와 견진 성사를 받고 정교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만 허용됩니다.
리뚜르기아는 감사 기도와 축복 기도로 끝맺습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가 끝난 후, 온 회중은 사제에게 나아가 성찬 봉헌물로 축성되는데 사용되지 않은 봉헌 빵의 나머지 부분을 ‘축복된 빵’(안티도론)으로 나눠 받습니다.
거룩한 감사의 성찬 예배
The Holy Eucharistic Liturgy
“우리는 하늘에 있는지 땅에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지상 그 어디에도 그와 같이 찬란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당신께 묘사할 수조차 없습니다. 다만 하느님께서 거기서 사람들 가운데 머무셨다는 것, 그들의 예배는 다른 모든 곳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뛰어넘는 것이었음을 말씀드릴 뿐입니다. …”
10세기 후반, 키에프의 블라디미르 대공은 다양한 그리스도교 중심지에 사절단을 보내서 그들의 예배 모습을 연구하게 했습니다. 위의 인용문은 바로 그 사절단들이 콘스탄티노플의 성 소피아(아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거행된 감사의 성찬예배에 참여한 후의 감회를 표현한 글입니다. 러시아 사절단이 표현한 이 심오한 경험담은 그 후로도 정교회의 아름답고 영감 넘치는 신성한 리뚜르기아를 처음으로 경험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거룩한 감사의 성찬 예배는 그리스도교 예배의 가장 오래된 경험일 뿐만 아니라 가장 특징적인 예배입니다. 이 예배를 그리스말로는 ‘에프카리스티아(Ευχαριστια)’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감사’를 뜻합니다. 특별한 의미에서, 이 말은 사람의 모든 일에 대한 교회의 태도의 가장 중요한 형태를 표현합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의 기원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을 기념하여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라고 하셨던 마지막 만찬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는 정교회 예배에서 가장 구별되고 중요한 사건입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이 예배 안에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기억하고 찬양하기 위해 그리하여 구원의 신비에 참여하기 위해 모이기 때문입니다.
정교회에서 감사의 성찬 예배는 ‘신성한 리뚜르기아(Θεια Λειτουργια)’라고도 불립니다. ‘리뚜르기아’라는 말은 ‘백성의 일’을 의미합니다. 이 표현은 감사의 성찬 예배의 공동체적인 특징을 강조합니다. 정교회 신자가 신성한 리뚜르기아에 참여할 때, 그는 더 이상 단지 설교를 들으러 온 고립된 개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는 성 삼위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라는 교회의 참된 목적에 참여하는 신앙 공동체의 일원으로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의 성찬 예배는 개별적인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전체로서의 교회에 있어서, 참으로 삶의 중심이고 영적 발전의 주된 통로입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는 독특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구현하고 표현할 뿐만 아니라 성 삼위 하느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진작시키고 심화시킵니다. 이 성사, 이 신비는 교회의 다른 모든 활동들이 향하는 목표이고, 또 그로부터 방향성을 얻는 중심입니다.
정교회의 중심적인 성사 신비인 감사의 성찬 예배는 연구되어야 할 텍스트가 아니라 오히려 기도와 음악과 몸짓과 피조 물질과 예술과 건축이 하나의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이루는,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친교 경험입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는 마음뿐만 아니라 감정과 감각들까지도 깊이 건드리는 신앙의 예배입니다.
세기를 거치면서 그리스도인들은 감사의 성찬 예배 안에서 다양한 차원들을 보아왔습니다. 이 예식을 표현하는 다양한 명칭들은 그것의 의미의 풍요함을 증언해줍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는 거룩한 봉헌, 거룩한 신비, 신비의 만찬, 거룩한 친교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정교회는 감사의 성찬 예배의 다양한 측면들을 인정하면서, 지혜롭게도 다른 것들을 해치면서까지 한 가지 요소만 강조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교회는 감사의 성찬 예배를 단지 가끔씩만 거행해도 되는, 마지막 만찬에 대한 단순한 기념으로 환원하는 것을 분명하게 피합니다. 성경과 전통의 가르침을 따라, 정교회는 거룩한 감사의 성찬 예배가 거행될 때 그리스도께서 그의 백성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감사의 봉헌물인 빵과 포도주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됩니다. 우리는 이 거룩한 봉헌물이, 궁극적으로 하느님께서 “만물 안의 만물”이 되실 새로운 피조세계의 첫 열매로 변모된다고 확신합니다.
정교회 - 예배
Orthodox Church - Worship
임금이신 우리 하느님 앞에 와서 엎드려 경배합시다.
그리스도 임금이신 우리 하느님 앞에 와서 엎드려 경배합시다.
그리스도 임금이신 우리 하느님 그의 앞에 와서 엎드려 경배합시다.
정교회는 매일을 이 초대와 함께 시작합니다. 저녁기도 예식인 만과 첫 부분에 나오는 이 초대는 정교 신앙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하나의 태도를 표현합니다. 성부 성자 성령 하느님께 드리는 예배는 정교회의 삶과 정신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정교회에서 예배는 너무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비정교인에게 정교회를 소개하는 최선의 방법은 바로 신성한 리뚜르기아 혹은 대표적인 성사들 중 하나에 참여해 보도록 권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방문자는 음악과 예식 그 자체에 압도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정교회의 풍미와 풍요한 전통들 그리고 살아있는 신앙을 진정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예배 안에서입니다.
정교회 - 예배의 두 가지 차원
Orthodox Church - Two Dimensions of Worship
예배는 전체 교회를 포함하는 하나의 경험입니다. 우리 각자가 예배를 위해 함께 모일 때, 우리는 사회와 시간과 공간의 경계들을 초월하는 하나의 교회의 지체들로서 그렇게 합니다. 비록 우리가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함께 모일지라도, 우리의 행위는 지역교회를 넘어서서 참된 하느님 나라에 이릅니다. 우리는 살아있는 신자들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신자들과 함께 예배드립니다.
정교회 예배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어서, 교회의 많은 예식들에 두루 반영됩니다. 첫째, 예배는 하느님 백성 한 가운데서 하느님의 현존과 행위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흩어진 백성들을 하나로 모으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현존 안에 들어갈 때 그분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십니다. 정교회의 예배는 하느님께서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머무신다는 것, 우리는 그분의 생명을 나눠 갖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을 아주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둘째, 예배는 하느님 현존에 대해 우리가 감사로서 협력하는 응답이고, 그분의 구원하시는 행위,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억입니다. 정교회 예배는 하느님께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하느님은 역사 속에서 행동하셨고, 또 성령을 통하여 지금도 계속해서 행동하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행위들을 되새기고, 기도와 감사로써 그분의 사랑에 응답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점점 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갑니다.
정교회 - 예배의 여러 표현
Orthodox Church - Various Expressions of Worship
정교회에서 예배는 네 가지 주요한 방식으로 표현됩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 : 이 예배는 정교회의 가장 중요한 예배 경험입니다. ‘감사’를 뜻하는 에프카리스티아(Ευχαριστια), 혹은 신성한 리뚜르기아(Θεια Λειτουργια)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성사들 : 성사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요한 사건들 혹은 계기들 속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개입하시고 행동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모든 주요 성사들은 감사의 성찬 예배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습니다. 세례 성사, 견진성사, 고백성사, 결혼성사, 신품성사, 성유성사 등이 있습니다.
특별한 예식과 축복식 : 이 또한 우리 삶의 모든 사건들, 필요들, 그리고 과제들 속에 현존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매일 예식 : 매일 거행되는 공적인 기도 예식들입니다. 이중 가장 중요한 예식은 아침기도예식인 ‘조과’와 저녁 기도예식인 ‘만과’입니다.
특징들
정교회의 예식들은 정교하고 장엄하고 길고, 또 기쁨이 깊이 스며든 느낌을 표현합니다. 이런 분위기는 정교회 예배의 지배적인 주제인 그리스도의 부활과 인간의 신화에 대한 우리의 신앙을 표현합니다. 이러한 감정을 고취시키고 충만한 참여를 격려하기 위해 예식들은 언제나 노래와 찬미로 불립니다.
예배는 단순히 말로만 표현되지 않습니다. 기도와 성가와 성경 봉독에 더하여, 많은 예식행위와 몸짓, 행렬 등이 있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현존과 그분과 우리의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비언어적 상징들을 풍부하게 사용합니다. 정교회 예배는 지성, 감정, 감각 등 인간 전체를 온전히 포함합니다.
정교회에서의 예식들은 미리 규정된 순서를 따릅니다. 우리의 예배에는 뼈대와 설계가 있습니다. 이것은 예배의 공통성이라는 차원을 보존하고 과거와의 연속성을 유지하게 하는데 매우 유익합니다. 예식의 내용 또한 정해져 있습니다. 바뀌지 않는 요소들이 있는가 하면, 축일이나, 절기나, 특별한 환경에 따라 바뀌는 부분도 있습니다. 전체 교회에 의해 예식들이 규정되는 것은 예배가 전체 교회의 표현이지, 특별한 사제나 집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배의 두 번째로 중요한 목적은 신앙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배와 교회의 가르침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신앙은 예배 안에서 표현되고, 예배는 신앙을 강화하고 전해주는 일에 봉사합니다. 그 결과 정교회의 기도와 성가와 전례적인 몸짓은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매개들입니다. 예식들을 규정하는 것은 또한 참된 신앙을 보존하고 그것을 오류로부터 지키는데 도움을 줍니다.
신성한 리뚜르기아(감사의 성찬 예배)와 성사들의 거행은 언제나 서품된 성직자에 의해 집전됩니다. 지역 성당에서는 보통 사제가 주교의 이름으로 집전하고, 가끔은 보제가 이를 보좌하기도 합니다. 주교가 있을 때는, 주교가 예식을 주재합니다. 성직자들의 의복들은 거룩한 직무로의 특별한 소명과 특별한 지위들을 표현합니다.
정교회에서 예배는 전체 교회의 표현이기 때문에, 신자 회중의 능동적인 참여와 개입을 필요로 합니다. 정교회에는 ‘사적인’ 예식, 혹은 ‘혼자만의’ 예식이 없습니다. 회중이 없이는 어떤 예식도 거행될 수 없습니다. 이같은 강력한 공동체적 감수성은 복수형으로 드려지는 기도들과 권고들로 표현됩니다. 회중은 성가를 부르고, ‘아멘’이라는 화답으로 기도문을 끝맺고, 연도에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응답하고, 십자 성호를 긋고, 절하고, 특별히 신성한 리뚜르기아에서 영성체에 참여하는 등의 행동으로 예식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요구받습니다. 정교회에서는 서있는 자세로 예배드리는 것을 권합니다. 회중은 신성한 리뚜르기아에서 성령의 임재를 기원하는 기도(에피클레시스)를 드릴 때와 같은 특별히 엄숙한 순간들에만 무릎을 꿇습니다.
연도(리타니아)는 정교회 예식에서 중요한 부분입니다. 연도는 사제 혹은 보제와 회중이 함께 드리는 기도문입니다. 그것은 여러 개의 간청 기도문으로 구성되고, 신자들은 “주여 불쌍히 여기소서” 혹은 “주여, 들어주소서”라고 화답합니다. 연도는 예식에서 자주 등장하고, 서로 다른 부분들을 구별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정교회 예배는 항상 회중의 언어로 거행됩니다. 공용의 보편적인 전례 언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종종 회중의 구성과 필요에 따라 한 예식에서도 두 가지 이상의 언어가 사용되기도 합니다. 전 세계적으로, 그리스어, 슬라브어, 아랍어, 알바니아어, 루마니아어, 영어, 일본어, 한국어 등 거의 모든 언어로 예배가 드려집니다.
정교회 - 하느님의 집
Orthodox Church - House of God
정교회 성당을 방문하는 사람은 보통 성당의 독특함, 그리고 서방 그리스도교 여러 전통의 예배장소와 정교회 성당의 외적인 차이에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정교회 성당 내부의 풍부한 색깔, 다양한 이콘들과 아름다움은 많은 가톨릭교회 성당이나 개신교 예배당에서 발견되는 단순성과 날카롭게 대조를 이룹니다. 정교회 성당에 들어서면, 색깔과 빛으로 어우러진 완전한 신세계에 들어선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성당의 예술과 디자인은 독특한 예배 분위기를 만들뿐만 아니라 정교 신앙의 근본적인 통찰들을 반영하고 구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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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 아름다움과 상징들
Orthodox Church - Beauty and Symbols
정교회는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의 창조주시라고 믿습니다. 창조주께서는 피조세계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통해 현존하십니다. 이것은 물질세계가 가치 있고 선하며, 하느님이 자신을 표현하시는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정교회는 성당 미화와 성사와 예식에서 물질적 피조물을 귀하게 사용한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러한 확신을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피조물의 맏물인” 빵과 포도주가 감사의 성찬 예배에 봉헌될 때, 그것들은 또한 온 피조세계를 창조주 하느님께 바치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피조세계의 선물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조금의 주저함도 없기 때문에, 정교회 성당 내부는 매우 아름답습니다. 특별한 분위기를 창조해내기 위해 고안된 건물은 기쁨의 느낌, 하느님의 너그러우심에 대한 감사로 가득 찹니다. 정교회 신자는 아름다움이 인간 삶의 중요한 차원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콘과 교회에서 이콘의 사용을 통해서 피조세계의 아름다움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매우 중요한 수단들이 됩니다. 물질세계의 신성한 선물들은 인간의 손을 통해서 창조주께 영광 돌리는 아름다움의 표현으로 빚어지고 주조됩니다. 경건한 여인이 값비싼 기름을 우리 주님의 발 위에 부었던 것처럼, 항상 정교회는 하느님께 최선의 아름다운 것을 바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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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 거룩한 공간
Orthodox Church - Sacred Space
정교회 성당 내부는 가장 중요하게는 정교 예배를 위한 배경과 무대입니다. 예술과 건축은 지성과 느낌과 감각을 두루 포함하는 총체적인 예배 경험에 기여하도록 고안됩니다. 감사의 성찬 예배와 여타의 신비로운 성사들은 하느님 안에서 일어나고, 하느님의 현존과 행위를 증거합니다. 그러므로 정교 전통 안에서, 성당은 하느님의 집, 하느님의 영광이 머무는 장소라는 강력한 느낌이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모든 정교회 성당은 거룩한 공간으로 축복되고 축성되고 구별됩니다. 성당 전체가 백성 가운데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을 증언하고 표현합니다. 하나의 오래된 교훈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당에 들어갈 때마다 하늘에 들어가고 있음을 잘 생각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느님의 위엄이 그분의 성당 안에도 똑같이 현존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생각으로 두려움과 공경심을 가지고 성당에 들어가야 합니다.”
정교회 성당은 예배 공동체의 느낌을 강조하고 진작시키기 위해 상대적으로 작게 지어집니다. 성당은 보통 십자가 형태로 건축되고 예비신자석, 신자석, 지성소 이렇게 크게 세 공간으로 나뉩니다. 예비신자석은 성당 출입구와 맞닿아 있습니다. 수세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세례를 받지 않은 예비신자들과 참회 신자들이 성찬 예식이 거행되는 동안 머무는 곳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세례 예식의 시작과 어떤 교구에서는 결혼예식이 바로 이 예비신자석에서 시작되어 신자석으로 이동하기도 합니다. 이 이동은 상징적으로 하느님 나라로의 점진적인 이동을 상징적으로 표상합니다. 많은 정교회 교구들에서, 예비신자석은 신자들이 신자석에 들어가서 회중과 하나가 되기 전에 봉헌초를 사서 이콘 앞에 초를 밝히면서 개인적으로 기도드리는 공간입니다. 신자석은 성당 한가운데의 넓은 장소입니다. 신자들은 예배를 위해 이곳에 함께 모입니다. 비록 우리 시대의 대부분의 정교회 성당은 좌석을 갖추고 있지만, 어떤 성당들은 옛 관습을 따라 좌석이 없는 텅빈 공간으로 남겨둡니다. 신자석의 오른쪽에는 주교좌가 있고, 주교는 그곳에서 백성들 한가운데 계신 그리스도의 살아있는 형상으로서 예배를 주재합니다. 주교가 부재할 때도, 주교좌는 언제나 개별 사목구 성당이 고립한 개체가 아니라 주교를 머리로 둔 주교구의 한 부분임을 상기시켜줍니다. 신자석의 왼쪽에는 복음경이 봉독되고 강론이 행해지는 봉독대가 있습니다. 성가대와 봉독자는 주로 신자석 한 쪽 먼 곳에 자리 잡습니다. 지성소는 오직 성직자들과 복사들만 드나들 수 있는 곳으로, 성당에서 가장 거룩한 부분입니다. 지성소에는 거룩한 제단이 있고, 성화벽(이코노스타시스)으로 신자석과 분리됩니다. 이 분리는 하느님의 통치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우리는 죄로 인해 여전히 하느님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주기 위한 것입니다. 하지만 신성한 리뚜르기아가 거행되는 동안, 우리가 거룩한 선물(성체 성혈)에 다가갈 때,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었고 그분을 통해서 우리가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음을 기억합니다. 모든 예식이 다 지성소에서 거행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두어야 합니다. 많은 예식들이 신자석 중앙, 회중 한 가운데서 거행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교회는 교회의 예배가 온 백성에 의해, 온 백성을 위해 봉헌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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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 제단
Orthodox Church - Altar
제단 혹은 거룩한 식탁은 정교회 성당의 심장이고 중심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빵과 포도주로 된 감사의 성찬예배 봉헌물을 하느님 아버지께 바치는 곳이 바로 이곳입니다. 보통 사각으로 된 이 제단은 벽에서 떨어져 있고, 종종 천으로 덮여 있습니다. 병자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어느 때고 영성체가 가능하도록 성체를 보관해 두는 성체함이 촛대들과 함께 제단 위에 놓입니다. 신성한 리뚜르기아(감사의 성찬 예배의 또다른 명칭)가 거행되지 않을 때는 제단 중앙에 복음경이 놓입니다. 제단 뒤쪽에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결합된 큰 십자가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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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 이코노스타시스(성화벽)
Orthodox Church - Iconostasis (Iconal Wall)
성화벽은 지성소와 신자석을 분리하는 벽으로 이콘들이 그 위에 배치됩니다. 정교회 성당의 매우 특징적인 요소인 이 성화벽의 기원은 지성소 앞의 낮은 벽 위에 이콘을 올려놓던 고대 관습입니다. 언제부터인가 이콘들은 높이 세워진 벽에 고정되게 되었고, 그래서 이코노스타시스(성화벽)라는 용어가 생겨납니다. 우리 시대의 관습에 의하면, 성화벽은 매우 정교하고 세워지고, 지성소 대부분을 가리기도 하지만, 때로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개방적인 형태를 띠기도 합니다. 성화벽에는 예식을 거행하는 동안 사용하는 세 개의 문이 있습니다. 양쪽에는 보제나 복사들이 드나드는 ‘보제문’이 있고 중앙에는 ‘임금의 문’이라 불리는 입구가 있습니다. 보통 예식이 거행되지 않을 때는 커튼이나 문으로 닫아놓아 제단을 가립니다. 임금의 문을 중심으로 해서 오른쪽에는 차례로 그리스도의 이콘과 세례자 성 요한의 이콘이 있고, 왼쪽에는 테오또꼬스(성모님)의 이콘과 성당이 봉헌된 주보성인이나 축일 이콘이 배치됩니다. 이 이콘들에 더하여, 다른 많은 이콘들이 공간 사정과 관습에 따라 추가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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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교회 - 이콘들
Orthodox Church - Icons
이콘은 정교회의 특징적인 예술 형태인 거룩한 형상입니다. 이콘이 나무에, 혹은 캔버스에, 혹은 모자이크나 벽화로 그려집니다. 이콘은 그리스도, 테오또꼬스 마리아, 성인들과 천사들을 묘사합니다. 이콘은 또한 성탄대축일, 부활대축일과 같이 성경이나 교회 역사 속의 사건을 묘사하기도 합니다. 이콘은 정교회의 예배와 신학에서 매우 두드러진 위치를 점합니다. 이콘은 단순히 장식이나, 감동이나,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이콘은 묘사된 인물의 현존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이콘은 하늘과 땅을 연결해주는 창과 같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우리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를 포함하는 교회, 이 교회의 일원으로서 예배드립니다. 우리는 지금 영광 속에서 주님과 함께 있는 이들과의 관계를 결코 잃지 않습니다. 이콘을 공경할 때마다 그리고 그 앞에 초를 밝힐 때마다 이 같은 믿음이 표현됩니다. 많은 정교회 성당은 성화벽뿐만 아니라 내벽과 천정 등에도 이콘을 그립니다. 지성소 후면 둥근 벽에는 보통 테오또꼬스와 어린아이 모습의 그리스도를 묘사한 커다란 이콘이 그려집니다. 정교회는 마리아가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믿습니다. 매우 중요한 이 이콘은 하느님 아들의 육화에서 마리아가 차지하는 중요한 역할을 기억하게 합니다. 이 이콘은 또한 교회의 형상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의 현존을 드러내야 할, 다시 말해 우리의 삶 속에 그리스도를 낳아야 할 우리 각자의 책임을 일깨워줍니다. 성당 가장 높은 곳, 천장 혹은 돔 중앙에는 전능하신 그리스도, 판토크라토르의 이콘이 그려집니다. 이 이콘은 하늘과 땅의 주님으로서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승리자 그리스도를 묘사합니다. 아래쪽으로 내려가며 바라보면, 성당 전체, 피조세계 전체가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위쪽으로 올라가며 바라보면, 만물이 우리를 주님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그분은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이십니다. 이것은 정교신앙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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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례와 예배
Liturgy and Worship
정교회 그리스도인의 삶과 그 특징은 교회의 전례 혹은 예배로 풍성하고 비옥하게 형성됩니다. 성경 구절과 다양한 시적이고 상징적인 표현들로 가득 찬 전례 본문들은 교회의 참되고 살아있는 전통을 하나의 영광송의 형태로 제시합니다. 전례에서 정교인들은 신앙의 근본적인 진리와 지속적으로 교감합니다. 예배는 신실한 기도의 신학, 성경의 백성이 드리는 살아있는 찬양의 제사, 영적인 세계의 관상, 성령과의 약혼, 그리고 장차 올 것들에 대한 미리 맛봄이 됩니다. 부활을 기념하면서 또한 본질적으로 종말론적인 정신을 가진 정교회의 전례는, 그 안에서 역사 속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권능의 사역을 지속적으로 되풀이하여 보여줌으로써, 이미 임하였고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나라를,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을 통한 우리의 구원의 약속으로서 기쁘게 경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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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생명의 유입
The Influx of God's Life
교회에서 이미 경험된 왕국의 권능은 믿음으로 봉헌된 신성한 신비들 혹은 성사들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창문을 통하듯이 이들 성사들을 통해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이 어둔 세상에 들어오셔서 죄와 타락에 죽음을 선고하고 영원한 불멸의 생명을 들여오십니다. 하느님의 생명이 변화나 혼동 없이 성사를 통해 현시대에 유입되고 섞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성사를 통해 당신의 창조되지 않은 신성한 에너지로 사람들의 생명을 정화시키고 축성하며 또한 깨끗히 하고 환하게 밝히며 어루만지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사 안에서 모든 이들과 동시대인이 되십니다. 모든 사람들과 세상의 구원을 위해 당신께서 행하신 모든 일들이 지금 성사들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의 구원하시는 권능이 성사를 통해 다양하게 드러납니다. 또한 성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교회에 현존하며 역사하십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지속적인 확장이기에, 성사들은 능력이며, 교회는 이 능력을 통해 사람들을 성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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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가올 삶을 위한 준비
Preparation for the Life to Come
성사들은 신자들이 다가올 삶을 준비토록 할 뿐만이 아니라, 그 삶을 지금 여기에 실현시킵니다. 우리는 성사들을 통해 다가올 것들을 미리 음미하고 보게 됩니다. 성사들은 끊임없이 그리고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전달해주시는 하느님의 변화시키는 능력, 즉 우리의 타락한 인성을 치료하시고 “죽음의 싹을 제거하시는” 그분의 능력 안에 들어가게 합니다. 성사를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기 위해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우리는 완전히 새로운 실재와 마주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사람됨의 진정한 의미를 온전히 자각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만나면서 또한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왜곡시키고 침범하는 힘, 즉 악의 권능을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동맹한 우리는 죄와 죽음에 대한 그분의 승리를 공유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의 권능은 우리 안에 있는 악을 정복하시고, 우리를 다시 하느님의 자녀와 왕국의 상속자로 만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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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Mystery”라는 말의 의미
The Meaning of the Word "Mystery"
각각의 성사는 직접적으로 그리스도에 뿌리를 둡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근원적인 신비이시고,(요한 1:1~18) 또한 모든 신비들의 참된 집전자이십니다. 정교회는 성화시키는 신적 은총을 드러내고 전달해주는 신성하게 제정된 예식들을 표현함에 있어, 성사라고 번역되는 sacrament대신에 신비라고 번역되는 그리스어 mysterion을 더 즐겨 사용합니다. mysterion 이라는 단어는 본질적으로 숨겨진 어떤 것, 불가해한 어떤 것을 의미합니다. 교회는 이 단어를 신앙의 교리와 본질적 신념에 적용하여 왔고 또한 성경에 수차례 표현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주요 의미는 세상의 구원과 관련된 하느님의 숨겨진 비밀스러운 의지와 연결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그 비밀스러운 구원 의지는 이제 육화하신 말씀(로고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리고 교회가 그 신비를 선포하고 또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때문에, 교회가 이를 수행하고 있는 본질적 행위 또한 신비로 불립니다. 이런 모든 행위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신 구원의 위대한 신비에 참여하는 자 그리고 수익을 얻는 자로 만들어집니다.”(알렉산더 슈메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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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적인 수단들을 통한 은총의 전이
The Transmission of Grace through Visible Means
거룩한 성사들은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동시에 조화롭습니다. 구원하고 성화하는 은총은 가시적인 수단을 통해 전이됩니다. “그리스도의 신-인 본성은 그분의 교회와 교회가 가진 은총의 수단들 모두로 확장됩니다.”(D. Constantelos) 이렇게 물질적인 형태로 영적인 실재를 구현하는 것은 육화의 신비와 물질의 궁극적 구원에 근거합니다. 이것은 신-인적 제도로서의, 그리고 역사 속에서의 그리스도 현존의 끊임없는 신비로서의, 교회의 본성과 일맥상통합니다. 이것은 자연의 기본적인 “선함”을 확언하며, 인간의 영육적인 본성을 자각케 합니다.
각 성사에 사용되는 성호와 몸짓과 물질적인 요소는 우리 경험적 현실과 연결되는 살아있는 상징입니다. 물질적인 것은 성령의 운반도구가 되고, 각각 신성한 은총의 신비스러운 권능을 깊고 충분히 표현하기에 적합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의 음식인 빵과 포도주는 일단 축성되면 불멸의 양식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됩니다.)
비록 외적인 표현으로는 물질적이지만 성사들은 단순한 상징적 의식이 아닙니다. 성사의 외적인 표식은 이들 표식 자체가 아니라 이 속에 내재한 성령의 현존으로 인해 은총을 실재적으로 운반합니다. 운반된 은총은 전혀 모호하거나 상징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그래서 각각의 사람들을 하느님의 형상과 닮음 안에서 재창조하고 완전케 합니다.
거룩한 성사들 안에 신적 에너지가 진정으로 현존하는 것에 대해 다마스코스의 성 요한은 아래와 같이 언급했습니다.
“하지만 만약 이것이 어떻게 일어나느냐고 묻는다면, 성령에 의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변화의 방법은 결코 이해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본성상 빵과 포도주와 물은 먹고 마심을 통해서 그것들을 먹고 마시는 사람의 살과 피로 변화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그 전과는 다른 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제단 위의 빵과 포도주와 물은 성령의 임재를 구하는 기도와 성령의 현존을 통해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합니다. 이것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고 똑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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